저물어 가는 가을 정원

오랜만에 맞는 햇살과 함께...

by 다나 김선자


겨울도 되기 전에 이미 너무나 많은 양의 비가 내렸어요. 가을의 때아닌 장마가 유난히 길고 음산하여, 이 심상치 않은 날씨가 겨울 내내, 내년 초봄까지 이대로 계속 이어질까 두려움이 앞섭니다.

지난 9월 20일 안달루시아에서 돌아온 이후 두 달이 넘도록, 겨우 일주일에 하루 이틀 잠깐 개일뿐, 물기가 여태껏 땅에서 마를 날이 없답니다. 마치 북쪽 섬나라 이일랜드처럼.


프랑스 루아르(la Loire) 강 이북지방은 구름이 큰 대야 속에 갇혀있는 형상이라 바상 파리지앵(bassin parisien)이라고도 일컫는 답니다. 그래서 겨울은 언제나 흐리고 잦은 비로 대기가 습하고 겨울이 참 길게 느껴지지요. 햇살도 겨울 동안은 깊은 잠에 빠져 든답니다. 따라서 겨울이 되면 우울증과 관절염 통증을 호소하는 사람도 많아요. 비타민 D 복용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정년퇴직을 하면 많은 라 헤지옹 파리지앤느(la region parisienne, 파리와 파리 근교 사람들을 일컬음)들은 따뜻한 기온과 풍부한 햇빛을 찾아서 이동하는 겨울철 새들 마냥 남쪽으로 거주지를 옮기는 경우도 많아요.


마른땅을 밟아보기가 쉽지 않아 외부 출입도 드문해 졌습니다. 쌩쌩한 마른 추위보다 더 싫은 습한 날씨로 나는 알프스의 마르모트(marmotte)가 겨울잠을 자듯이, 바깥 활동도 소원해집니다. 오랜만에 선물처럼 찾아온 햇살에 여전히 대기는 누습 하지만 한동안 둘러보지 못한 정원으로 나가 보았어요. 동글동글 물방울을 잔뜩 머금은 나뭇잎과 풀잎들이 화사한 아침햇살을 받아 찬란하게 반짝입니다.

가지치기를 못한 무화과나무와 멕시코 오렌지 나무도 제멋대로 사방에서 자유분방 즐기고 있었어요. 색색 낙엽들은 파란 잔디 위에서 페르시아산 양탄자와 같은 아름다운 추상적 무늬를 만들었고, 나무 밑 둥치에서, 테라스 귀퉁이에 수북수북 쌓여서 누렇게 퇴색되고 있었어요.


20년 전 내가 파리에 처음 도착했을 때 한창 겨울을 지나는 길목이었는데, 긴 겨울을 지나온 잔디가 어찌나 생기 찬 모습으로 파랗게 누워 있던지 정이 가지를 않더군요. 내게는 그 활력 넘치는 모습이 잔인하게도 느껴져서 참 얄밉기도 했어요. 아마도 그때 외로운 내 처지와는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에서 나온 질투심이었답니다. 내가 두고 온 안락한 고국의 모습과 너무나 상이한, 한갓 풀보다도 못한 내 자리, 잔디조차도 나의 존재를 비웃듯 무관심한, 누구에게도 위로받지 못하는, 내 힘든 상황의 비참함에 슬픔과 원망스러움이 교차된 복잡한 마음으로, 긍정적인 시각과 판단력이 상실되어버린, 그때는 내 능력의 한계였습니다.

지금은 너무 익숙되어 버린 이 기후와 풍경에서, 이제는 한국의 갈색빛으로 메마른 겨울 풍경이 나를 잊어버린 듯, 내가 그를 잊었는지 낯설게 보이기도 한답니다.


정원에 내 작은 텃밭은 자주 내린 비로 가을걷이를 미처 못한 대파와 양파가 땅에 바짝 무거운 몸으로 엎드려 있습니다. 대파를 일으켜 세워보니 살집이 허물고 심하게 몸살을 앓고 있었어요. 비가 너무 자주 내린 탓이겠지요. 쪼개진 대파 속을 유심히 살펴보니 흙색 빛에 잘 볶아놓은 참깨 같은 벌레가 공생하고 있었어요. 기회를 놓치지 않는 기생충입니다.

땅이 얼어붙을 정도의 날씨가 아니므로 뿌리째 심어두면 초겨울까지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애써 남겨 두었는데, 이렇게 상한 모습을 보니 애처롭고 아깝기도 합니다.

내친김에 상태가 원만한 것으로 잘 다듬으면 꽤나 먹을거리가 있겠다 싶어 절반만 뽑았어요. 유기농이라 파뿌리가 어찌나 실하고 단단하게 박혔는지 파를 뽑아 올리던 내가 되레 뒤로 내동댕이 칠 뻔했답니다. 겉은 상했어도 그 심장만큼은 뜨거웠지요.

이 모든 것은 어쩌면 지렁이의 큰 노력 덕분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정원 땅속에는 얼마나 많은 지렁이가 살고 있는지 상상을 초월한답니다. 낮에 겉으로 드러난 것들만도 굉장한 숫자지만, 밤에 보는 그 모습은 여름 바캉스철 해수욕장 인파를 방불케 한답니다.

땅 속에서 나왔다 들어갔다, 신나게도, 민첩하게 흙을 삼키고 뿜어내며, 밤중에는 끈적하게 사랑을 나누기도 그리고 모두가 밤이슬을 맞으러 외출을 한답니다.

겨울이면 처마 밑에서 말라죽어가는 지렁이들도 숱하게 많습니다. 참 애잔하고 안타깝지요. 모두 온기를 찾아서 실내 쪽으로 기어 오던 모습 그대로, 마른 고사리 마냥 까맣게 쪼그라져 바닥에 바짝 붙어 있습니다.


촉촉한 잔디 위를 사뿐히 걸었는데도 금방 갈아 신은 신발에 젖은 흙이 한 움큼 엉겨 붙었어요. 지렁이들이 부지런히 먹고 쏟아낸 분변토랍니다. 지렁이들 덕분에 텃밭은 작지만 수확은 올해도 꽤 좋았어요. 또한 그들은 우리 집 정원 꽃들을 옆집 뜰에서 피고, 이웃 정원의 꽃이 우리 집 뜰에서 피어나게도 한답니다.


하늘에 잿빛 구름이 낮게 덮였습니다. 겨울 햇빛은 참으로 인색하고 게으름을 피우지요. 또는 파리지앤느처럼 변덕스럽기도 하답니다. 아니면 나처럼 쉬이 지치는 체질인지, 낮 종일토록 햇살을 비추는 날이 거의 없어요. 해가 없는 정원은 쓸쓸합니다. 신발에 들어붙은 습한 냉기가 몸속으로 파고듭니다. 어릴 적 느꼈던 따끈한 온돌방이 한없이 그리워지는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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