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파니 날

갈레뜨 데 호와(galette des rois) 파이를 먹는다

by 다나 김선자



A는 제철이 가기 전에 맘껏 먹겠다고 생굴과 샤블리산 백포도주와 호밀빵을 사러 갔다가 갈레뜨 데 호와 파이까지 들고 함박꽃이 되어 현관을 들어선다. 분명 긴 겨울 동안 햇볕을 그리워하며 군것질을 즐기는 나를 위하여 태양을 품에 끼고 함박웃음을 나누고 싶었음이 확실할 터인데 '저걸 어떻게 다 먹지?' 나는 근심부터 싹트지만 그의 얼굴에서 관능적 이게도 환하게 피어난 함박꽃이 시들거나 단방에 꺾이지 않도록 애써 내 입 언저리에서 피어나는 작은 홍매화를 본다.


오늘이 에피파니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내 위장이 감당해야 할 고통을 염려하여 사실은 모른 체하고 있었다. 매 해마다 시댁에서 가족들과 성탄절에 이어 에피파니 날을 기념하여 다 같이 파이를 잘랐지만 이제는 내 위장이 아흔 중반을 껑충한 두 시어른들 소화력을 당해 내지 못한다. 결코 그들도 왕성한 소화력에 반하여 기력만큼은 쇠해져, 우리는 두 분의 탄생일과 성탄절이나 부활절 같은 큰 경사를 축하하는 날을 제외한 가족들과의 축일 오찬은 대폭 줄이고, 약식으로 우리 부부만의 추억을 만들기로 했었다. 또한 내 민감한 위장이 엄청난 고생을 감수해야 하는 시댁 가족들과의 주일마다 정찬도 자제하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우리 전통 명절에도 팥죽 먹는 동짓날에 이어 설을 맞아 조상님께 제를 올리고 가족끼리 덕담을 나누며 정월 대보름날 오곡밥과 각종 나물을 먹듯이, 가톨릭 문화가 중심 역할을 하는 프랑스 전통 축일은 성탄 전날 밤 성당 미사에 참석하거나 온 가족이 모여 밤을 지새우고 성탄절 주찬을 성대하게 치른다. 이어 연말은 친구들과 새해맞이를 축복하고 해가 바뀌어 부활절이 오기까지 에피파니를 끝으로 겨울철 큰 축일이 마무리된다.


에피파니(Épiphanie)는 일 년 중 밤이 가장 길다는 동짓날 긴 어둠을 지나 새해가 되면서 낮이 점점 길어지는 성탄 이후 12일째 되는 매년 1월 6일에 빛의 축제라고도 일컫는, 세 동방박사가 별의 인도를 받아 아기 예수 출현에 선물을 들고 온 날이다. 프랑스에서는 전통적으로 새해 처음 맞는 일요일에 그 축일을 기념하여 태양을 상징하는 둥글고 빛이 나는 갈레뜨 데 호와(galette des rois)라는 파이를 먹는다.


갈레뜨 데 호와는 으깬 아몬드 소를 넣어 만든 파이로 속에는 왕을 상징하는 잠두 콩이나 누에 콩이라고도 부르는 큰 콩이 들어갔지만 오늘날은 어린이들을 겨냥한 상업성으로 잠두콩 대신 비슷한 크기의 다양한 동물이나 꽃 모양 플라스틱 또는 세라믹으로 만든 제품이 들어있다. 따라서 이 콩을 차지하는 사람은 이날의 왕이 되어 프랑스 왕권을 상징하는 백합꽃 문양 금박 종이 왕관을 쓰고, 왕비를 취택하여, 선택된 왕비에게 자신의 왕관을 씌워주기도 한다.

항상 내 시어머니는 잘라진 파이를 나눌 때 나를 기쁘게 하려고 훤히 보이는 그녀만의 애교스러운 계략을 꾸며 왕의 상징물 콩이 든 파이를 은근슬쩍 내 접시에 놓아주셨고 간혹 술책이 삐끗 나 왕 자리를 놓치더라도 가족들은 언제나 나를 왕비로 간택했었다.

사실 인즉 나는 그동안 프랑스에서 왕도 왕비도 아니었지만 여자가 귀한 시댁에서는 머나먼 동양에서 온 작은 공주였다.

더 나아가 이전에는 하나 들어 있던 왕관도 오늘은 두 개씩이나 들었으니 요즘 세상에는 모두가 왕이고 왕비들이란 말인가?

이제는 호기심 어린 큰 매력 따위는 잃었지만 한동안 아이들 못지않게 어른인 나 역시도 올해 또는 이 빵집의 파이 안에 무엇이 들었을까? 오늘 왕은 누가 될까? 게다가 콩 수집하는 쏠쏠한 재미도 있었으니 솔직히 아이들이 가지는 그 기쁨을 상상해 보라?

그리고 갈레뜨 데 호와는 디저트이기도 하지만 사이참으로도 손색없어, 그 어떤 음료들보다 백포도주나 샴페인, 무소, 무스카, 사과술이나 사과주스와 겹들이면 무엇보다 잘 어울리는 궁합이다.

나는 갈레뜨 데 호와 파이를 다른 케이크보다도 즐긴다. 갓 구운 바싹거리는 파이 옷과 부드럽고 쫄깃한 식감 나는 빵에 그리 달지 않으며 내가 무척 좋아하는 아몬드 소까지 듬뿍 들어있어, 그 맛이 탱글탱글하게 콩고물이 든 송편을 먹는 기분과 비교할 수 있을까? 물론 전혀 아니고 아니라 하겠지만 적어도 내 향수만큼은 그랬었다.


주님 공현 대축일이 다가오는 그 주에는 동네 빵집마다 대형 마케트까지 갈레뜨 데 호와 파이가 순식간에 성탄절 선물로 있었던 쵸코렛 자리를 점령하여, 헤아릴 수 없이 반짝이는 수많은 둥근 태양들로 고소한 빛을 가득가득 뿜으며 집집에서 마구 함박꽃을 피우려고 기다린다.


에필로그


에피파니 날로부터 정확히 이틀 후 나는 밤새 복통에 시달려야 했었고 결국 위와 아래로 토해내는 십수 년 전과 같은 불상사를 겪어야 하는 악몽이 재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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