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 쿵스레덴(Kungsleden)
누구나 힘든 순간은 갑자기 찾아온다.
마음이 쉬고 싶다는 순간을 알아차릴 수 있을지언정, 어려움의 정도를 알아내기란 힘들다.
쉼을 이유로 어디로든 떠나고 싶은 부푼 마음으로 정처없이 떠날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고민의 과정으로 답을 지우기도 하고 누군가는 답을 얻고 실행의 시작으로 점을 찍을지 모른다.
쿵스레덴, 이 야생의 길을 걸으며 내가 소원하던 실행의 시작점을 찾았고 표정 없는 무채색의 얼굴이 알록달록해지기 시작했다.
2019년 5월, 프라하행 비행기표를 발권했다.
유학생이었던 체코인 친구는 자신의 고향인 프라하에서 취직을 했다. 함께한 추억들이 많아 꼭 자기가 살고 있는 곳에 놀러오라고 했었고, 자주 체코로 오라는 이야길 했었다. 외국인 친구와 이렇게 마음이 통할 수 있다는 것도 신기했다. 그렇게 어린시절부터 꿈꾸던 홀로 떠나는 유럽여행이 차근차근 그려졌다. 며칠 뒤, 친구에게 facebook messenger가 왔다.
"스칸디 트립 같이 갈래? 네가 좋아할 거야!"
친구가 물었다.
"체코에서 북유럽까지 비행기 값은?"
퇴직금을 탈탈 털어가던 나는 비용이 가장 큰 걱정이었다. 특히, 북유럽의 살인적인 물가는 모르긴 몰라도 끔찍했다.
"내 회사차로 이동할 거야. 정말 싸게 가는 여행이야. 백패킹 할 거고, 너랑 나는 같은 텐트에서 잘 거야.”
몇 초간의 고민을 끝내고 나는 어딘지도 모를 스칸디트립 대장정에 크게 숟가락을 얹었다.
“그래, 가보자!”
여행 시작 전, 쿵스레덴에 대한 정보가 없었고 기대감도 없었다. 삶이 무료했고 지루해서 ‘뭐든 하면 괜찮겠지’하는 마음으로 시작했다. 새로운 땅에 닿으면 신선한 기운을 받고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스칸디트립에 대한 큰 기대는 없었다. 하지만 친구는 만나고 얼마 뒤, 달라진 내 모습에서 나의 우울함을 알아챘다. 마라톤이나 달리기를 취미로 즐기는 건강한 친구였던터라, 같이 달리자며 10km 가까이를 뛰게 만들었다. (친구는 스칸디트립 내내 매일 일어나자마자 50분 안에 10km를 아침마다 뛰었다.)
그리고 쿵스레덴에 대해 알아봤냐고 물어봤다. 이 유명한 트레킹 코스를 모르냐며 나를 구박했다. 나는 하나둘씩 검색해보았다. 생각보다 한국인들이 꽤 다녀간 트레킹 코스였다.
유럽의 마지막 남은 자연.. 야생.. 백야.. 모스키토 파라다이스.. 피엘라벤 클래식.. 6월~9월 딱 3개월만 열리는 스웨덴 북부에 위치한 왕의 길.. 쿵스레덴!
‘설레는 단어들로 가득한 이 길엔 도대체 무엇이 있을까?’
‘사람들은 무엇에 열광하며 이 곳은 왜 유명한걸까?’
쿵스레덴을 편히 갈 수 있는 루트는 피엘라벤이라는 스웨덴 아웃도어 브랜드에서 진행하는 행사를 신청하면 가장 좋다고 한다. 하지만 피엘라벤 클래식은 비싸고, 경쟁률이 치열하다. 나처럼 쿵스레덴을 친구들과 간다면, 가끔 길을 잃을 수 있고 무서울 수 있다. (5일을 걸으면서 딱 2팀 만났다.) 지도를 잘 보고 길을 잘 찾는 친구가 있다면 한번 도전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거대한 자연이 펼쳐지기 때문에 길을 잃으면 3시간 이상을 걸어야 할 수 있다.)
그렇게 저렇게 준비한 우리는 체코 프라하에서 만나 출발했다. 3명이 돌아가며 밤을 새워 운전을 하고 페리를 여러 번 갈아타며 스웨덴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는 운전을 못해서 설거지 담당이었다.) 돈을 아끼겠다는 마음으로 거창한 식사는 버거킹이었다. 북유럽의 살인적인 물가는 마트를 찾게 만들었다. (물도 깨끗해 보이는 곳이 있으면 떠먹었다.)
‘우와 드디어 내일이면 쿵스레덴에 간다.’
쿵스레덴의 전체 코스는 440km지만, 가장 유명한 구간인 110km를 5일에 걸쳐 걷는 코스로 갔다. 길을 리딩 하기로 했던 친구는 지도 출력본을 코팅해서 보여줬고, 나침반과 가민 시계로 길을 안내할 준비를 해왔다. 걸스카우트와 보이스카우트를 합체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체코에서 사 온 전투식량을 한 명씩 배분하고 각 자 가방에 넣고 간단한 식사룰을 정했다.
"아침은 단백질 쉐이크, 점심/저녁은 전투식량 그리고 배가 고플 땐 에너지바를 먹자!"
"그리고 하루에 20km 이상씩 걸을 거야! 무조건 걸어야 해!”
우리가 출발한 시간은 저녁 7시쯤이었지만, 백야로 어둡진 않았다. 물건들을 각자의 배낭에 가득 담고 설레는 마음으로 길을 걷기 시작했다.
설렘이 고조됨과 동시에 모기들이 들러붙었다. 손가락을 물기 시작했고, 나중엔 바지를 뚫고 피를 빨아먹었다. 모스키토 파라다이스!! 커다란 모기들이 움직일 때마다 부딪히는 소리들이 무슨 말벌들이 얼굴에 들러붙는 것 같았다. 순간순간 모기들의 힘이 느껴졌다.
거기에 내 배낭은 80L 자리 가방이었다. 가볍지 않고 튼튼한 영국 브랜드였고 당시에는 BPL(Backpacking Light) 개념이 없어서 무겁디 무거운 그 가방을 메고 하루에 20km씩 걸었다.
걸으면서 놀라운 나를 발견했다.
"걷는 게 참 쉬웠고 생각이 끊어지는 순간들이 생겼다. 그리고 잘 할 수 있었다. 그래 걷는건 내가 참 잘하지!”
참고로 나는 몇 년간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꽤 심하게 앓고 있었다. 아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생각의 고리를 끊기가 너무 힘들었고 나만의 안개 속에 갇혀 지낼 수 밖에 없었다. 그럴수록 점점 더 무기력해졌다. 잠을 못잤고 면역력이 떨어졌는지 온몸에 알러지와 알러지의 상처 자국들이 몸을 덮고 있었다. 금방 사라질 것 같았던 자국들은 1년 넘게 없어지지 않았고 나의 우울증은 계속 약을 먹어야하만 하는 상태로 유지됐다. 그렇게 생각 끊기가 쉽지 않았던 나의 머릿속이 몸이 고단해지면서 생각의 고리가 끊어졌다. 거기에 아무 불편함 없이 텐트에서 기가 막히게 잘 자는 나를 발견하고는 감사한 일들이 마구마구 떠올랐다.
'두 다리가 튼튼해서 여길 올 수 있었구나.'
'20km 걸어도 지치지 않는 체력을 가지고 있었구나.’
'나에게 이렇게 많은 에너지가 있었고 그걸 분출할 수 있는 여건을 만날 수 없었구나..'
'나에게 편한 상황들을 자주 만들어주지 못했구나, 나를 괴롭게 만드는 상황에만 집어 넣고 있었구나..'
그렇게 걸으면서 내 자신에게 뼛속까지 미안해졌다. 내 손가락, 발가락, 손바닥, 발바닥, 손톱, 발톱, 눈, 코, 입, 기름진 피부와 머릿결까지 미안했다. 생각하기 힘든 내 몸의 어딘가까지 생각하면서 계속 걸었다. 그리고 미안했다. 그렇게 걷다 보니 고요하고 거대한 호수를 둘러 걷고 있었고 나와의 대화를 끊임없이 하고 있었다.
'나는 왜 살아야 하지? 어떻게 살아야 하지?'
대답을 할 수 없을 것 같은 질문들을 머리에 말하면서 가슴을 울리고 있었다. 힘들어서 눈에 초점이 한 방향으로 고정되고 어깨와 골반은 허리를 구부리고 서있는 게 편할 정도로 힘들었다. 잘 곳을 찾겠다는 간절한 마음 하나로 최적의 취침 장소를 발견했고 힘들다고 말할 겨를도 없이 우린 물을 끓였다. 배가 고프면 먹고, 자고, 일어나고, 걷고를 반복하다 보니 하루하루가 단순해졌다.
자고 나면 해가 떠있고 일어나도 해가 떠있는 날씨에 익숙해져 갈 때 즈음에, 적응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났다. 우리 한국사람들은 바지런히 일어나서 미리 준비를 해두고 시간이 아주 소중하지 않은가? 빠르고 신속하게! 한국인의 정신 아니겠는가? 그리고 나는 다음 목적지까지 최대한 효율적으로 가고 싶었다. 모든 짐을 싸고 텐트를 접고 친구들이 편하게 정리하라고 산책까지 하고 왔다. (나를 위한 배려였을까?) 그런데, 이게 웬일? 내 친구들은 약속 시간보다 1시간이 넘도록 자고 있었다.
"쟤네들 너무 심한 거 아니야? 1시간이 넘었어!
어제 우리 12시쯤 나가기로 했는데, 1시간이 지났다고!"
한국 유학을 오래 했던 체코인 친구에게 말했다. 나는 당장이라도 깨우려는 기세로 움직였다.
"쟤네들도 휴가야. 너의 휴가가 아니잖아. 내버려둬!”
'띵!' 머리를 세게 맞은 것 같았다. 내가 뭔데 남의 휴가를 나의 시간처럼 누리려고 했을까? 모두의 휴가 말고 각 개인의 휴가에 대해서는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그렇게 조용히 2시간을 넘게 기다렸다. 사부작사부작 일어나 처언처언히 친구들은 짐을 챙겼다. (아직도 그 모습은 내 기억 속에 아주 느린 슬로모션처럼 기억되고 있다.) 그렇게 또다시 걷고 걸었다. 그 와중에 길을 안내하던 친구가 길을 잃어 3시간을 조금 넘게 헤맸다. 안내자 역할을 해주던 나무판과 표식이 없어지고 이상한 길과 습지에 발을 풍덩풍덩 담그며 묵묵히 걸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보기 드문 자연환경의 구멍이 여기저기 뚫려 있는 예쁜 습지였다. 하지만 모스키토 파라다이스) 몸은 힘들었지만, 그 친구의 부담이 클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함부로 길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고 우린 그 친구를 믿고 묵묵히 걸었다. 아무도 없는 광활한 자연에 우리 4명만 남아서 길을 걸었다. 한데, 두려움에 반해 더 커지는 믿음의 모순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3시간을 헤매고 길다운 길을 찾았을 때, 방방 뛰며 기뻐하던 리딩자의 모습을 잊지 못하겠다.
그렇게 우리는 그날 25km를 걸었다.
날이 갈수록 머리카락은 기름져갔고 몸에서는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참고로 화학제품인 샴푸를 사용할 수 없다.) 길은 색다르고 다양하게 험해졌다. 차디찬 강을 건너면 눈길을 지나야 했고 눈길을 지나면 꽤 높은 언덕을 넘어가야 했다. 언덕을 오를 때마다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팠다. 허리가 아플 때마다 우리는 'stop'을 외치고 체코어로 된 욕을 신나게 했다. 욕을 하며 웃었다. 한국욕도 많이 알려줬다. 아프다고 슬퍼하고 또 욕을 하고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
그렇게 걸으면서 알았다.
'내 마음이 너무 아프구나. 나는 나와 대화하고 싶었구나'
‘힘들지 않아 보이는 일상을 살면서 왜 이렇게 힘들까?’
‘나와의 대화가 부족했구나..’
일하면서 일상을 보내면서도 살고 싶지 않았는데.. 그냥 이대로 사라져도 세상은 잘 돌아갈 것만 같았는데.. 물거품이든 가루든 물결이든 고체든 액체든 어떻게든 내가 사라지기만을 바랐는데.. 나의 문제는 다른 사람들의 세상만 보며 나의 세상을 돌보지 못한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세상을 부러워만 하고 눈치만 보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세상에 집중하고 싶고 다른 사람들의 세상의 기준으로 무거운 짐을 지고 살고 있다면, 쿵스레덴에 그 짐을 풀어두고 다른 배낭을 짊어지고 걸어보길 바란다. 그리고 모든 감각들과 대화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말 못 하는 나를 만나고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길 바라며 내면의 치유가 일어나길 바란다.
‘모두에게 이너피스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