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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사라진 시간', 연대와 공감이라는 따스한 위안

감독 출사표 낸 정진영의 현대판 '구운몽'



최근 미국에서 벌어진 백인 경찰의 과잉 체포 과정에서 흑인 청년이 사망한 사건에 전 세계가 경악하면서 'Black lives matter'라는 캐치플레이즈로 유럽 빅리그 팀들의 유니폼이나 국내외 클럽축구 경기의 골 세리모니에서도 흑인 인권 보호를 상기시키고 있다.

농구황제 마이클 조던 역시 인종차별에 대한 우려감에 경고를 던졌는가 하면 지구 반대편에 일어난 사건이지만, 소셜 네트워크의 발달로 남의 일이 아닌 언젠가 우리, 우리 자녀들이 당할지도 모른다는 공감과 일종의 타자와의 연대의식이 아닐까 한다.



충무로의 신스틸러로 오랜 연기 생활을 이어온 배우 정진영의 감독 데뷔작 <사라진 시간> 역시 연대와 공감이라는 가장 따스한 위안에 대해 조명한다.

영화는 의문의 화재 사고로 사망한 외딴 시골 부부의 사건을 추적하던 경찰 형구(조진웅 분)가 마을 회관에서 송로주를 마시고 술에서 깬 뒤 모든 것이 뒤바뀐 충격적인 상황을 맞이하게 되는 기묘한 이야기를 그려냈다.

한정된 공간을 소재로 해서인지 연극배우로 오랜 연기 내공을 쌓아온 정진영 감독은 스크린에서 두 편의 연극을 관람한 듯한 느낌이 들도록 피카레스크식 구성과 회화적인 연출을 통해 '나의 정체성 탐구'라는 메시지를 기묘하고도 기이한 컬트무비에 녹여낸다.

특히, 이창동 감독의 연출부를 경험했던 정 감독은 사이코 메트릭 스릴러와 오컬트 등의 요소를 덧입혀 장르의 전형성을 탈피한 독특한 컬트무비를 완성해냈다.



상업영화의 서사에 익숙한 관객들에게 마치 과거 왕가위의 '아비정전'을 범죄 액션물로 알고 관람했다가 배신감을 가졌던 사례처럼 결말을 짓는 오락영화로 생각한 관객들에게 실망감을 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 작품은 정답이 쥐어지는 기존 상업 영화의 전형성에서 탈피하여 시간의 전복을 활용해 관객에게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겨둔 열린 결말을 택해 사유의 즐거움도 제공하기도 한다.

만약, 사건을 추적하는 경찰 형구의 이야기가 먼저 나오고 역할이 뒤바뀐 사건이 이어지는 수사극이나 범죄 스릴러라는 장르로 구성했다면 그렇고 그런 기획성 영화로 그쳤을지도 모른다.

필자의 생각엔 현실과 기억의 충돌로 자아분열을 앓고 있는 싱글남 형구가 이웃집 주민 해균(정해균 분)의 한밤 중 외도를 목도한 후 시골마을에서 소박한 삶을 꿈꾸는 교사 부부의 삶을 욕망했을 것 같았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에서 친정엄마의 육성이 빙의된 지영(정유미 분)처럼 밤이 되면 전혀 다른 인격으로 정신분열을 일으키는 아내 이영(차수연 분)을 둔 교사 수혁(배수빈 분)의 삶은 결국 타자와의 연대와 공감을 얻지 못하고 파국을 맞는다.

창문과 출입구를 철제 창으로 바꾸고 스스로 감금을 청한 부부의 삶은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이지만 잿더미로 변해버린 화재사건 현장의 풍경처럼 타자와 관계에 실패하고 자신을 부정한 채 속을 까맣게 태워버린 우리를 보는 듯했다.

특히, 영화 속에서 상상과 현실의 경계를 구분 짓는 것은 자신의 제자이자 해균의 아들 진규(강민 분)의 존재 같아 보였다. 상상이나 꿈속의 나는 제자의 사물함을 들여다볼 수 없지만 현실에선 소년이 깨진 액자 속에 비밀로 간직한 것이 이주여성 엄마이고 홀아버지와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처럼.





또한 경찰 형구의 가족 구성원 이름 또한 동명이인이라고 하더라도 현실성과 동떨어져 보인다. 전지현(신동미 분)을 아내로 두고 두 아들이 박지성과 박주영이라니. 마치 영화 <인셉션>에서 현실과 꿈을 구분 짓는 토템처럼 영화 속의 이런 장치들은 영화관을 나오면서 유추할 수 있게 한다.

가장 무서운 순간 꿈에서 깨어난다면서 끝없이 달리고, 이웃집 주민 해균을 화재 사건으로 위장해 죽이지만 형구가 발견한 건 고라니의 주검이었다. 이렇듯 자신을 부정하다가 이영(형구)의 뜨개질 강습 사 초희(이선빈 분)와 만나면서 점차 정체성을 회복해나간다.


언제나 혼잣말로 스스로를 위로하던 형구는 영화 속에서 그가 만든 허구의 캐릭터로 보이는 초희와 만나 '너만 그런 것이 아니다'라는 위로를 전하는데,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일종의 공감과 연대감을 얻으면서 시골학교의 교사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였다.

자고 일어났더니 한 편의 꿈이었더라는 고전 소설 '구운몽'의 시작처럼 그가 상상이나 꿈속에서 그려냈을 시골 부부의 평범한 삶은 마을 사람과의 관계 회복은 물론, 초희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곧 다가올 미래에 이뤄질지도 모른다.  

'자면서 품는 욕망의 쓰레기 소각은 꿈이고, 깨어나 품은 욕망의 쓰레기 소각은 상상'이라며 극 중 형구가 정신건강의학 전문의와 만나 듣게 되는 충고에서 볼 때, 나와 또 다른 나를 욕망하기보다는 고통스럽더라도 현실을 직시하고 이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 감독이 전하려던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시크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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