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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아이', 타자와 경계를 허무는 소통의 방식

선택을 통해 성장통을 겪는 인간의 삶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



오늘처럼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날, 생각나는 영화가 있다. 두 아이를 양쪽에 안고 눈밭에 누운 엄마의 모습이 떠오르는 영화 <늑대아이>다.


평범한 여대생 하나가 대학 강의실에서 알게 된 늑대인간과 사랑하면서 늑대아이를 낳아 희생적인 모성으로 아이를 키워낸다.


호소다 마모루 감독의 영화 <늑대아이>는 타자와 소통하기 위해서는 나와 다른 타자의 고유성을 사유하고 자신을 변화시킬 때 비로소 경계를 허물고 타자와 유대할 수 있다는 것을 성찰하게 해주는 작품이다.


특히, 영화 <늑대아이>에서 가장 의문이 드는 장면은 영화 초반부 아메를 낳은 하나가 비 내리는 날, 귀가하지 않는 남편을 찾아 나서 집 주변 다리 밑에 버려진 늑대의 주검을 보고 오열하는 신이다.


이 장면 속 공간은 늑대인간이 자신의 정체성을 미처 밝히지 못하고 주저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스릴러나 호러 등 장르 영화에서 비 내리는 날, 다리 밑은 흔히 희생자나 피해자를 포착하는 독특한 장소성을 갖는데, 이 영화에서도 다리 밑은 타자와 경계를 짓는 장소성을 나타낸다.


성장과 육아를 소재로 다룬 영화들에서 우리가 익히 봐왔던 아버지의 부재라 여길 수도 있겠지만, 호소다 마모루 감독은 왜 타자의 시선을 통해 인간의 모습이 아닌 늑대의 모습으로 그의 주검을 포착하였을까.




늑대인간 아빠는 인간인 엄마 하나와 가정을 이루었지만, 자본주의라는 시스템 아래에서 생계와 육아라는 멍에를 진 채, 기본적인 인권마저도 보장 받지 못해 영원한 타자로서 벌거벗겨지듯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감독은 늑대인간의 죽음을 통해 제도라는 시스템 아래에서 구원의 희망을 버린 채로 외롭게 죽음을 맞이하는 사회 약자들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려는 게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남편의 주검 앞에서 통곡하는 하나에게 우산을 씌워주는 행인의 모습을 통해 타자와 관계에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질문하는 듯하다.


즉, 그의 죽음으로 인해 하나와 아이들은 이제 자아와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탈출하여 타자와 어떠한 관계를 형성해나가야 하는지 숙제를 안게 되는 필연성이 예고되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이 자살인지 타살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의 죽음은 그녀가 더 이상 패배감에 매몰되지 않고 타자와의 관계성 회복을 위한 복선으로 해석할 수 있다.


타자와의 관계성 회복은 비를 피할 우산을 씌워주듯이 진심이 담긴 따스한 위로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하나가 늑대아이를 키울 결심을 하듯 타자의 고유성을 사유하게 되면 타자와 소통하면서 사상, 인종, 국가, 성별 등의 타협할 수 없을 것 같은 경계를 비로소 허물 수 있음을 이 작품은 보여준다.


경계란 사물이 어떤 기준에 의해 구분되는 한계로, 건강한 경계선은 자아의 정체성을 보호하는 좋은 점이 있다. 하나는 죽은 늑대인간을 대신해 아이들의 정체가 외부에 노출되지 않도록 보호하면서 소통마저 거부하는 또 다른 타자가 된다.


인간은 경계 없이 태어나지만 부모와 사회 시스템에 의해 끊임없이 경계선을 긋고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세워진 높은 울타리로 인해 단절을 경험하게 되고 결국 자기 울타리에 갇히게 된다.


영화 <늑대아이>의 하나는 늑대인간의 정체성을 잇는 타자로서 자아의 정체성과 가정이라는 경계가 허물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아이를 위한 것이라 믿고 유아건강실태 조사차 나온 타자의 방문마저 거절하고 문을 굳게 걸어 잠군다.





"얘들아 앞으로 어떡하구 싶어? 인간으로 살래 늑대로 살래"라고 말하면서 이사 결심을 하게 되고, 이것이 그녀가 자신과 아이들이 어떻게 살 것인가 선택할 수 있도록 귀농을 선택한 이유가 됐다.


들판에서 자유롭게 뛰놀던 유키와 아메가 귀를 쫑긋 꼬리를 드러내며 하나와 나란히 앉아 석양을 바라보는 명장면 또한, 이후 늑대아이들이 문명과 자연적인 삶 사이에서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는 사건의 복선을 깔고 있다.


하나는 이렇게 말한다. "원래는 사람들 눈을 피해 이사온 거였는데, 정신차려 보니 사람들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어"라고. 즉, 그녀는 늑대아이의 정체성을 보호하기 위해 도시를 벗어나 경계를 높게 쌓으면서 시행착오를 겪게 된다.


하지만, 그녀의 말처럼 육아와 생계를 영위하기 위해 아이들을 타자들 속에 들여놓게 되고 마을 주민들과 소통하면서 밭에서 수확한 작물들을 이웃들과 나누기에 이르는 것이다.


 



나와 타자의 경계를 가르면서 자기의 소유를 더 확고히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경계를 바로 구분할 줄 알게 되면서 경계를 허물고 그것을 뛰어넘는 소통의 힘을 통해 타자와 올바른 관계를 맺을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해 가는 것이다.


영화 속 유키는 엄마 하나로부터 늑대로 변하지 않도록 하는 주문을 외우기도 하지만, 세상에는 그들이 모르는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이 너무 많기에 이들은 각자 학교와 숲에 대한 동경을 갖게 되면서 두 아이는 선택하게 되고 이어 가치관의 충돌로 인해 갈등을 겪게 된다.


그렇다면 두 늑대아이는 왜 서로 다른 길을 선택하였을까? 인간 아이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는 유키는 어릴 적부터 타자와 자유분방하게 소통하면서 작은 사회공동체인 학교에서 정체성의 갈등도 일으키고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타자에게 밝히고 인간을 사랑하기에 이른다.


반면에 아메는 인간 공동체 적응을 실패하고 계곡에서 죽을뻔한 고비를 넘긴 이후 야생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면서 타자(선생님 여우)에 의해 자연으로 돌아가기 위한 훈련을 받으며 여우의 후계자가 된다.


극중 아메의 뒷모습은 죽은 늑대인간과 흡사하고 유키는 차분하면서도 낙천적인 하나의 캐릭터를 빼 닮았다. 즉, 이 영화는 유키와 아메를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 속에 자아와 타자의 연속성을 포착해내고 있다.



비록 죽음을 맞이했지만, 하나의 꿈에 나타나는 늑대인간은 영화 전반을 지배하며 하나가 아이들에게 자율성을 부여하고 선택할 수 있도록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도록 돕는다.


영화 <늑대아이>는 선택을 통해 성장통을 겪는 인간의 삶을 작가의 깊이 있는 철학으로 통찰하고 있다.


우리 주변에 늑대인간은 많다. 장애인이 될 수도 있고 성적 소수자, 다문화가정, 독거노인 그리고 아동학대나 은둔형 외톨이를 경험한 사람 등 타자와 소통에 얼마나 노력하였는가 자문하게 만든다.


이제 타자를 위해 그리고 타자와 소통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이 영화는 하나와 두 늑대 아이를 통해 타자와 관계에 무감각해져 버린 우리들에게 타자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하고 자신이 쌓은 경계를 허물어야 타자와 소통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지혜를 일깨운다.


특히, 스펙이나 서열 중심으로 우리의 자녀들을 타자로 몰아넣고 부모의 방식과 생각을 강요할 것이 아니라 두 늑대아이와 이별을 준비하는 엄마 하나의 선택처럼 아이들이 꿈 꾸는 것, 그리고 그들의 생각이나 가치관을 생각하여 잘할 수 있도록 격려해주는 것이 지금 해야 할 일 아닐까.

/소셜큐레이터 시크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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