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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발 아래 남겨진 이름, 미국을 묻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의 '원 배틀 애프터 언아더'를 보고


미국이라는 이름 아래, ‘진짜 나’로 살아가는 윌라의 이야기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이민자의 시선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중임된 이후 위태로운 미국의 이민자 정책을 성찰한다. 겉으로는 박진감 넘치는 전투와 액션이 펼쳐지지만, 사실 그 중심에는 윌라(체이스 인피니티 분)라는 인물의 내면적 성장과 정체성의 갈등이 섬세하게 담겨 있다.

윌라는 이민자의 피를 물려받고 자란 소녀로, 행방불명 상태가 된 엄마를 대신해 16년 동안 길러준 전 혁명 전사 출신의 부친, 밥 퍼거슨(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분)과 함께 평온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사춘기 시기를 보내는 윌라에겐 진영 간 대립, 납치, 도주, 출생의 비밀 등 한 번에 감당하기 힘든 상황에 내몰린다. 외부 세상에서 쏟아지는 “너는 진짜 미국인이냐?”라는 질문이 윌라의 마음에 비수를 꽂은 것은 아닐까?

이민자들이 일궈낸 미국이라는 나라가 기회의 땅처럼 보이지만, 트럼프의 백인 우월주의 같은 순혈주의를 이유로 이민자를 배척, 탄압하는 정체성의 아이러니에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은 주목한다.

이민자 탄압에 나선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은 백인 순혈주의, 극우 인종주의적 비밀 결사 조직이다. 이들은 ‘순수한 백인 혈통’을 지키고 세상을 지배하려는 극단주의자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강력한 권력과 부를 바탕으로 정치, 경제, 사회 각 분야에 깊숙이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 단체는 영화가 다루는 미국 사회의 근본적 불평등과 인종 갈등, 권력 유지를 위한 어두운 이면을 상징화한 존재로, 영화의 주제의식인 ‘뿌리의 정체성’ 문제와 맞물려 극 중 이민자 과격 단체인 '프렌치 75'와 대비된다.

윌라의 부모인 밥과 퍼퍼디아(테야나 테일러 분)가 활동했던 '프렌치 75'는 미국 남서부 멕시코 국경의 이민자 구금소를 습격해 갇힌 이민자들을 해방시키고, 정부의 반이민 정책과 억압에 대항해 폭력적인 투쟁을 전개한다.

이들은 혁명과 자유를 외치며 스티븐 J. 록 조 대령(숀펜 분)으로 대변되는 정부와 극우 세력과 맞서 싸우는 저항 세력으로, 지금은 이민자 거주지역에 은신하면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힘을 쏟고 있다.



혁명가의 전설, '아버지의 이름으로' 실패의 연속에서 빛을 발하다

퍼퍼디아의 사망설로 이민자 거주지역에서 16년간 잘 숨어 지내왔던 밥은 윌라가 생기면서 육아를 전담하게 되고 약에 쩌들어 암구호도 기억 못 하는 신세에 처한다.

스티븐 일당의 급습과 탄압에 따라 보금자리를 등지게 된 부녀는 이민자들을 보호하는 가라데 도장 관장 세르지오(베니시오 델 토로 분)의 지휘 아래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이윽고 도시에서 전투와 추격씬이 펼쳐진다.

다행히도 윌라는 '프렌치 75' 단원으로부터 구출돼 ‘용감한 비버 자매회 수녀원’(Brave Beaver Sisterhood Convent)이라는 명명된 곳에서 신변을 보호받고, 가족 및 신념에 대한 새로운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이 단체의 리더인 ‘디앤드라’(레지나 홀 분)는 윌라에게 엄마에 대한 비밀과 미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 등을 설명하고 극적으로 대피시킨다. 이곳은 영화 속에서 윌라가 단순 피해자에서 스스로 선택하는 주체로 성장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카메라는 극 중 윌라가 자신이 진짜 어디에 속하는지, 미국인으로서 정체성에 대한 내면의 갈등을 강조하면서 윌라가 용병 아지트에 넘겨졌을 때 성조기 장면을 반복적으로 담아낸다. 흔들리는 성조기, 음지에 그늘진 깃발은 미국 사회의 불안과 아이러니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결국 사춘기 소녀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누구에게나 완전한 스위트홈이 되어 주지 않는다고 각성하기에 이르게 되는데...

이후 영화는 웨스턴 누아르처럼 질주한다. 그를 추격해 온 스티븐 일당에게 붙잡힌 윌라는 출생의 비밀을 비로소 알게 되지만, 자신을 제거하려는 스티븐과 극우단체의 하수인 용병 군인들로부터 추격을 당하면서 목숨까지 위태롭다.



"당신 누구야?" "윌라야, 네 아빠야" 올드보이 아나키스트의 암호명

승용차를 탈취해 고속도로로 질주하는 윌라, 턱끝까지 뒤쫓는 군인 용병 그리고 약간 오래된 일본산 닛산차를 훔쳐 타고 그 뒤를 쫓는 밥의 숨 막히는 추격씬은 범죄 액션 스릴러를 표방한 영화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직선 주로에서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하는 추격씬은 올드보이 아나키스트 밥에게 '잠시 멈추고 파도를 생각해' 보라고 조언한 세르지오의 말처럼 흡사 넘실대는 파도를 떠올리고 조니 그린우드의 음악까지 더해져 서스펜스를 최대로 끌어올린다.



하이웨이에서 급제동이 쉽지 않은 두 대의 승용차 충돌 씬에 뒤이어 도착한 덜컹거리는 밥의 차가 멈추기에 용이했던 건 하늘이 도왔기 때문일까? <태양의 후예> 송중기처럼 스티븐으로부터 살인 청부를 받은 이민자 출신 킬러의 여자와 어린이는 건들지 않는다는 신념 때문이었을까!

혁명 전사의 후예가 된 윌라의 "당신 누구야?"라는 말에 암구호를 대지 못하고 총기도 기억도 퇴색해 버린 밥의 "윌라야, 네 아빠야"라는 대사는 아가페적인 부성애를 담아내며 끝내 손에 든 총을 내려놓는 순간으로 기억될 것이다.



이 작품은 사회 정의라는 게 특정 권력주체에 의해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소중한 주변 사람을 지키는 자유의지라고 말하는 듯하다.

윌라는 비로소 ‘내가 어디에 속할 것인가’라는 점에 스스로 답을 찾은 듯 보였다. 피를 나눈 가족이든, 선택된 가족이든 결국 정체성이란 누가 정해주는 게 아니라 살아가는 과정에서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임을 말이다.

미국을 이민자의 나라라고 부르지만, 그 안에 순혈주의를 고집하는 극우파와 수많은 인종, 민족들이 뒤섞여 있다.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이번 작품은 밥의 다소 엉뚱하고 코믹하며 뚝딱거리는 여정을 통해 현 정부의 이민자 정책을 예리하게 조명한다. 부조리한 현실 속에 미국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마스터피스라 할 것이다.

편집증을 지닌 스티븐 역을 맡은 숀펜과 좌충우돌 하는 올드보이 아나키스트 역을 맡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연기는 더할 나위 없어 보인다.


/ 소셜큐레이터 시크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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