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 가르쳐 준 관계의 온도

이십 년 만의 기차여행 그리고 이별

by 정선미

여행은 풍경보다 관계를 더 또렷하게 보여주었다.

여수의 밤보다 더 선명했던 건,

우리 사이의 거리감이었다

결혼을 하고 나서는 친구와 여행을 간다는 건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다.
언제나 ‘아이 때문에’, ‘남편 때문에’, ‘일 때문에’ 미뤄졌던 나만의 시간.
고등학교 시절 내내 붙어 다니던 친구와, 무려 이십 년이 지나서야 처음으로 함께 기차에 올랐다.
버스커버스커의 ‘여수 밤바다’를 들으며, 우리는 무작정 여수행을 결정했다.


새 학기 직장에서 어렵게 연차를 내고, 가족을 뒤로한 채 홀로 떠난 이십 년 만의 여행.
기차 안에서 우리는 함께하지 못한 친구들에게 여행기를 실시간으로 공유하며 들떴고,
여수의 밤바다를 거닐며 맥주도 나누고, 소녀처럼 낭만을 만끽했다.


“그때 그 말” 하나로 깨져버린 우리
그런데 문제는, 여행이 끝나고 나서였다.
내가 무심코 꺼낸 한마디가 친구를 분노하게 했다.
정확히 어떤 말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분노는 카톡방 속 다른 친구들에게도 전염되듯 퍼져나갔다.
오해를 풀기 위해 애를 썼고, 우리는 긴 통화와 대화를 반복했지만
끝내 친구의 노여움은 가라앉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카톡방을 나갔다 들어오기를 반복하다, 영영 나가고 말았다.
우리도 지쳐, 조용한 휴식기를 가지기로 했다.
안타깝게도 지금까지도 그 조용함은 계속되고 있다.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알게 된 것들
가끔 생각한다.
만약 그때 여수 여행을 가지 않았다면, 그 오해의 실타래는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하지만 지금 남아 있는 친구들과 나는
오히려 관계의 피로감에서 벗어나, 더 편안해졌다.
그때는 몰랐다.
그녀가 ‘불쌍해서 같이 갔다’고 말할 줄은.
장애가 있는 딸을 키운다는 이유로 나를 함부로 규정하고,
자신의 위로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걸.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우정의 이름으로 포장된 동정은, 결국 관계를 무너뜨린다는 것을.
나는 그 여행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 친구는 그 시절, 여러 열등감에 묻혀 있었다.
늘 월등하고 앞서야만 했던 사람이었지만,
그 당시엔 남편의 사업이 무너지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었다.
친구들 사이에서 뒤처진다는 조급함 속에서,
그는 나를 만만한 위로의 대상으로 삼았는지도 모른다.
가끔은 내 행복을 부러워하는 듯했고,
현실을 직시하라는 말로 내 기쁨을 멈추게 하기도 했다.
걱정이라는 이름으로 건네는 말이, 내 마음을 상하게 하곤 했다.

오래된 인연이 좋은 친구가 되진 않는다
함께한 세월이 오래되었다고 해서, 좋은 친구가 되는 건 아니다.
내가 기쁠 때 진심으로 함께 기뻐해 주는 사람,
슬픔을 섣불리 해석하지 않고 묵묵히 들어주는 사람.
그런 친구가 결국 곁에 남는다.
이제는 안다.
타인의 고통을 함부로 헤아리는 건 자만이고,
우정을 빌미로 건넨 동정은 결국 무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럼에도 나는,
그 여행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 여정 끝에
나는 누군가의 시선이 아닌,
나 자신을 다시 바라볼 수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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