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에 가장 찬란했던 여정
* 앞서 찬란한 인생 1편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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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에서 즐거웠던 추억과 아쉬움을 뒤로하고, 나의 첫 인턴 생활이 시작될 캘리포니아 주 레드우드 시티(Redwood City)로 넘어가게 되었다. 함께 동고동락하며 가족과도 같았던 6명의 시카고 멤버들은 모두 각기 다른 지역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레드우드 시티는 샌프란시스코에서 기차로 약 1시간 떨어져 있는 교외 지역이었다. 회사는 레드우드 시티에 위치해 있었고, 내가 살게 될 집은 버스로 약 30분 거리에 있는 팔로 알토(Palo Alto) 지역이었다. 팔로 알토 지역은 그 유명한 스탠포드 대학교(Stanford University)가 있는 곳이다. 아직도 대학교 앞 다운타운을 자주 거닐 던 그때가 기억에 선명하다. 촌놈이 아이비리그 대학을 서성거리다니 나로선 감개무량했다. (이 정도면 정말 내가 시골때기 촌놈인 줄 알겠지만, 한국에선 나름 중소도시에 본가를 두고 살았다. ㅎㅎㅎ)
캘리포니아 주의 단점을 꼽자면, 차가 없이는 이동 수단이 많이 불편하다는 점이다. 당시 차를 살 여유는 없었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려니 배차간격이 터무니없이 길었고 저녁 6시만 되어도 운행을 종료했었다. 이런 이유로, 나는 유일한 교통수단으로 자전거를 구매해서 나의 애마?처럼 매일같이 이용하며 붙어 다녔다. 자전거로 편도 1시간 정도를 출퇴근했고 주변 마트를 갈 때나 다운타운을 갈 때마다 늘 자전거와 함께 했다. 때문에 겨울 시즌엔 무릎 통증이 심해져서 한 달 동안 집에서 혼자 무릎 찜질을 하며 겨우 회복하곤 했다. (미국에선 의사 얼굴만 봐도 2,30만 원 이상 깨지니, 최대한 건강관리에 힘썼고 가능하면 민간요법이나 Drug Store 같은 매장에 가서 약을 처방받았다.)
나의 첫 인턴 생활은 나의 커리어에 시야와 안목을 트일 수 있었던 값진 경험이었다. 나의 교육 전공에 맞게 비영리 교육기관에서 근무할 수 있게 되었고 중산층 이하의 고등학생들을 위해 비즈니스 교육과 함께 미래 기업가, 사업가로서의 인재 양성을 위해 설립된 재단이었다. 학생들의 대학 입학을 위해 장학금 지원과 필요한 이력서, 에세이 작성도 지원해 주었다. 사실 미국에서 일을 할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너무 뿌듯했고 내가 앉아 있는 위치가 마치 이 기관의 얼굴이 되어주는 듯 모든 직원이 왕래하면서 마주할 수밖에 없는 자리에 있었다. 최대한 밝은 미소와 함께 어떤 직원들과도 밝게 인사하려고 노력했고 우리 기관에 찾아오는 학생들에게도 환영받는다는 느낌을 줄 수 있도록 인사했다. 그렇다 보니, 언젠가 기관의 CEO 분께서 내게 말하길, "I like your smile"이라고 말해주었다. 나의 노력이 한꺼번에 보상받는 기분이 들었다.
이 기관에서 일하면서 실제 고등학교에 가서 수업을 참관해 보고, 기관에서 주최하는 행사나 학생들에게 제공하는 멘토링과 같은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여해 보며 느꼈던 점은, 우리나라 고등학교에도 이러한 교육 지원 프로그램과 시스템이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오로지 입시위주의 교육에서 벗어나 앞으로 사회생활로 뛰어들어갈 학생들을 위해서 그들의 잠재력을 뽑아내고 그것을 실현시킬 수 있게 만드는 지원제도가 있다면 적어도 나와 같이 입시 스트레스에 허덕이며 추억이 없는 고등학교 생활을 보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너무나 매력적이었던 프로그램 중 하나는, 캘리포니아 주의 특성상 실리콘 밸리가 집중되어 있다 보니 다양한 분야의 멘토들을 섭외할 수 있다는 큰 장점이 있었다. 그러한 멘토들이 진행하는 비즈니스 수업을 듣고 시중에 판매할 제품 아이디어를 기획, 발표, 제작, 판매까지 하는 일련의 4년 프로그램이 우리나라의 수동적이기만 한 고등학교 생활과는 확연히 비교될 정도로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이렇게 6개월 간의 나의 첫 인턴 생활이 끝나갈 무렵, 사실 연장의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는데, 나는 또 다른 기관에서 다른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1차 인턴까지는 스폰서 기관에서 배정을 해주었지만, 2차 인턴부터는 규정상 내가 스스로 일자리를 구해야 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Grace Period로 30일이 주어졌다. 사실 미국에서 스스로 일자리를 구한다는 것은 정말 하늘의 별따기 같았다. 다른 미국인들과도 똑같이 입사경쟁을 해야 하니 내가 고용주의 입장이라도 같은 조건에 현지인을 뽑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하지만 주어진 최대기한은 다가오고 어떻게 해야 할지 싶을 때, 프로그램 현지 주재원님께 발등에 불 떨어지는 심정으로 연락드렸다. 그런데 주재원님은 오히려 선뜻 주재원님이 일하시는 뉴욕 영사관에서의 일자리를 내게 제안해 주셨다. 사실 시카고에 있었을 당시에, 뉴욕을 짧게 여행했었지만, 함께 동행했던 친구들과도 트러블이 있었고, 좋은 기억으로 남지 않아 구직활동을 할 때 뉴욕은 완전히 배제하고 다른 미동부 지역 전체에 이력서를 뿌리곤 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선뜻 다가온 선물 같은 제안이 너무나 감사했고, 나는 6개월 간의 캘리포니아 생활을 마치고 가장 '핫한' 뉴욕으로 갈 수 있었다.
*Grace Period : 정확한 뜻은 유예기간, 프로그램 규정 상 30일 이내에는 직무활동을 해야지 체류기간을 연장할 수 있었다.
드디어 뉴욕에서의 첫날. 하지만 나의 온몸에는 빨간 두드러기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캘리포니아 주의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조깅을 즐기곤 했었는데, 2월의 뉴욕은 눈폭탄이 한창이었다. 갑작스러운 온도변화에 몸에서 이상반응이 일어났고, 급하게 베이비 로션을 사다가 온몸에 덕지덕지 발랐다. (덕분에 젊은 청년의 방안 전체에 베이비 로션 냄새가 가득했었다. ㅎㅎㅎ) 이렇게 적응의 순간들을 잘 흘려보내고 뉴욕에서 나의 두 번째 인턴생활을 시작하였다. 또 한 번 느끼는 거지만, 촌놈이 뉴욕에 있는 대한민국 영사관이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정장을 입고 맨해튼으로 출근하는 나 자신이 진짜 뭐라도 된 것처럼 뿌듯했다. 영사관 앞에 팔던 맛있는 베이글 트럭도 잊을 수가 없다. 한 손엔 커피와 한 손엔 베이글을 들고 출근하는 나. 진짜 뉴요커뽕?을 듬뿍 맞았던 그때가 이제는 그립기까지 한다.
나는 영사관 내 교육부 파트에서 일할 수 있었다. 교육부 원장님과 프로그램 현지 주재원님을 도와 내가 참여하고 있는 프로그램 홍보를 비롯, 한국에서 진행하고 있는 원어민 교사 연수 프로그램 홍보와 필요한 행정 업무를 지원하였다. 운이 좋았던 점은, 대학 2-3학년 때 원어민 교사연수 프로그램의 보조교사로 일했던 경험이 있어 누구보다 프로그램을 잘 알았고 나의 경험이 뒷받침되어 홍보를 적극적으로 할 수 있었다. 실제 내가 프로그램을 하며 찍었던 사진들이 있어 뉴욕 현지 취업박람회나 온라인 사이트에서도 참고자료로 활용할 수 있었다. '남는 게 사진'이라더니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뉴욕에서의 인턴 생활은 나의 사진 자료와 경험, 적극성이 충분히 발휘될 수 있었던 시간들이었다.
무엇보다 뉴욕에서 인턴 생활하면서 나에게 남은 큰 자산은 함께 일했던 직원들이었다. 높으신 영사분들과 인사를 나누며 한 자리에서 식사를 같이 할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영광이었고, 특히나 함께 동고동락했던 인턴 직원분들하고도 깊은 유대관계를 형성할 수 있게 되어 참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각자가 이곳 영사관에서 일하게 된 계기는 달랐지만 모두가 하나같이 친절하고 상냥했고 함께 자주 어울려 다니며 많은 추억을 쌓기도 했다. 인턴 직원분들하고는 근처 펜실베니아 주의 어느 한 산장을 빌려 놀러 갈 정도였으니, 회사에서 만난 사람들이 아니라 적어도 중, 고등학교 시절의 친한 친구들 모임과 같았다.
이제 모든 시간이 흐르고, 마음 같아선 더 연장해서 뉴욕에서의 생활을 이어가 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재정문제로 보다 일찍 한국에 귀국을 할 수밖에 없었다. 20대 초반의 나이에 다녀왔던 첫 타국 생활이자, 자립 생활은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내 마음속엔 마치 '한 여름밤의 꿈'과 같다. 아직까지도 그 1년 6개월의 생활이 꿈만 같고 20대에 겪은 가장 찬란한 경험이라고 말하고 싶다. 나의 앞으로의 인생에 또 한 번 이런 찬란한 꿈과 같은 경험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지금은 나의 인생에 새로운 챕터를 맞이하는 시기이다. 나를 힘들게 했던 이전 회사의 생활을 마무리지었고 새로운 분야로 시작해 보기 위한 시점이다. 나의 새로운 시작을 응원하며 앞으로 펼쳐질 또 한 번의 찬란한 인생을 기대해 본다.
여러분들에게 가장 찬란했던 인생의 순간은 언제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