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기 혹은 미련 / 결단 혹은 포기

그 사이 어딘가

by 서리

하던 공부를 그만두고 나면, 이게 홧김이었는지 용기였는지 분간이 가지를 않는다. '번아웃'이라는 그 흔한 이름을 핑계로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그만두는 것은 아닐까, 사실 내가 준비하던 길이 가장 잘 맞는 길은 아니었을까 등등. 온갖 잡생각이 불현듯 떠오르다가 항상 마지막에는 '그래서 이제 뭐 할 거야?'라는 숨 막히는 물음을 던지는 것이다. 정해진 길만을 걸으면서 항상 옥죄고 답답하다는 마음은 있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이 나름의 길잡이 역할을 해주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초등학교 다음엔 중학교, 그다음에는 고등학교, 그다음은 대학교. 이건 나에게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고 이뤄내야만 하는 것이었다. 대학 입시를 준비하면서 구역질이 나고 힘겨울 때도 많았지만 어차피 그것은 나에게 '해야만 하는 것'이었고 나는 나에게 '끈기'있는 사람이라는 타이틀을 붙일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좌절을 하더라도 포기는 없었다. 포기하지 않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으니까. 좋은 대학에 가야 하는 것은 나에겐 선택이 아닌 의무에 가까웠다.


고시를 준비하는 것도 그것과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했다(사실은 같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부모님이 무척이나 바라는 일이었고 학교에서도 많은 지원을 해주었다. 이대로 합격하기만 하면 승승장구하며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게 된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그렇게 거의 반년을 달렸다. 고작 반년이었다. 그 반년의 끝에 나는 책에 쓰인 글자를 보기만 해도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리고 구역질이 날 거 같았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다. 정말로 그랬다.


그리고 그렇게 지칠 대로 지친 나에게 변명처럼 떠오르는 질문이 하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언제 행복할 수 있지?'


대학만 가면 조금은 행복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에 찼던 기대와는 다르게, 나는 어쩌면 더 나를 갉아먹으며 살고 있었지 않았을까. 내가 꿈꾸던 대학생활은 분명 이런 모습은 아니었는데.

'내가 속았다'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정말 속았구나. 행복이라는 건 퀘스트를 깨면 오는 보상 같은 것이 아니구나. 그냥 알아서 챙겨 먹어야 하는 간식 같은 거구나. 어쩌면 이 지극한 당연한 말을 이제야 절실히 느끼는 것은 사실 나에게는 조금 슬픈 일이다. 인생에 대한 희멀건 환상 같은 것이 없어진 기분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이 행복을 도대체 어디서 찾아야 하지? 내 인생의 어디에서 이런 행복을 느낄 수 있지? 이런 잡다한 고민들을 하기 시작했다. 대 2병이라는 말이 그냥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해의 끝에서 나는 지독히도 이 병이라는 것을 앓았던 것 같다.


나는 이 행복을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으로 풀어보기로 했다. 정말 이건 나에게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좋아하는 일이라는 건 굉장히 사소한 것들이다. 어렸을 적부터 생각만 했었던 글쓰기 작업을 이렇게 해본다든지, 여러 군데 돌아다니며 풍경 사진을 찍는다든지 하는 것들이다. 열 살 때부터 혼자 소설 쓰기를 즐겨했었는데 그것도 다시 시작해 보고, 천문대도 가보고 마라톤 대회도 나가보는 것이다(물론 참가에 의의를 두어야겠지만 말이다...). 저번에는 집 앞 하천에서 한강까지 8km가 넘는 길을 걷는 생각에만 있던 일도 해보았다. 그 끝에 마주친 풍경은 정말, 정말 아름다웠다(표지사진을 참고하기 바란다). 이런 일들을 스무 살 때 했으면 좋았으려 만 하는 후회는 있다. 하지만 이런 후회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의미가 없는 짓이라는 걸 알기에 그만두었다.


내가 했던 결정이 현명한 결단이었는지 포기였는지 사실 분간은 잘 가지 않는다. 지금은 망망대해에 떠 있는 조각배 같은 심정이라 나의 마음이 어디를 향해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결단과 포기라는 글자는 결국 나 스스로 붙여주는 것이고 미래의 나에게 이 작명의 권한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선택을 최선으로 만들라는 말이 이렇게 절절하게 다가올 줄이야. 한 번 멋지게 살아보려 한다. 인생에서 끈기만 있는 줄 알았던 내가, 엄청난 결단력도 갖추고 있었구나! 하는 날이 오도록 말이다.


마지막으로는 오랜만에 올해 초에 써 내려갔던 내 일기를 들추어 보며 마음에 들었던 부분이 있어 잠깐 남겨놓고 간다. 대학생의 어설프고도 철없는 푸념을 들어준 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심정이다.



가을일 적 교실에 노곤히 펴지는 그 뭉근한 햇살을 참 좋아했다. 창가 자리었기에 문을 살짝 열어 놓으면 불규칙적으로 시원한 하늘색 바람이 들어왔다 나가기도 하였다. 그 바람을 좋다고 맞으면서 이내 꾸벅꾸벅 졸아버렸던 어느 날의 한문 시간이 기억난다. 분명 미성숙했지만 그랬기에 아름다운 것도 있었다는 것을 느끼며 지금의 나도 충분히 그렇다는 것을 깨닫는다. 미완의 괴로움과 즐거움, 결국 나는 어느새 오색빛 청춘의 한가운데로 들어왔던 것이었구나! 소리 없이 다가온 청춘과, 이것은 변덕증이 아니요, 인생입니다 하는 처방과, 이내 소리 없이 흘러갈 청춘이, 생각하면 할수록 사무치게 아쉽고도 슬프다가도 내가 아끼는 것들이 그렇게나 많아서, 혹은 그만큼 깊은 것이기에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된다. / 어제는 날이 좋아서 동네에 있는 강변으로 산책을 나갔다가 군데군데가 얼어붙은 폭포를 발견했다. 그 앞 벤치에 앉아서 멍을 떼리다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기도 하였다. 이 동네에는 어쩐 일인지 모를 사진 찍는 외국인들과 빨대로 커피를 들이키며 성큼성큼 걸어가던 한 남자... 폭포 외의 정경은 이 정도만 떠오르고, 그 큰 물줄기가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를 마냥 궁금해하며 그저 계속 바라다보았다. 그러면서 지금 나의 복잡한 마음도 걱정도 모두 쓸어가거라, 생각했는데 그 무정한 것이 순간 대단해 보여서 그것을 두고 감히 이런저런 의미를 붙였던 것이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쏴아아- 또는 우르릉! 고개를 돌리면 더 낮게만 들렸던, 한가로운 금요일에 눈치 없이 큰소리치던 그림자 같은 폭포의 소리도 너무 멋있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된 어느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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