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조종키를 잡고 있는가?
인생이 괴로워질 때 명심해야 할 한 가지가 있다.
'나는 내 인생을 너무 가까이서 보고 있구나'
이걸 깨달아야 한다.
근시안적 인생에 대해 생각해 보자.
근시안적이라는 말은 단지 시간과 관련한 것은 아니다. 시간과 더불어 자아와 내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서도 '근시안'이라는 단어를 붙일 수 있다. 마치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보통의 사람들이 그러하는 것처럼 말이다.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살아오면서 수많은 배경과 환경을 마주하게 된다. 그건 어떻게 보면 아주 객관적이다. 열이 나 병원에 간 나는 흰 가운을 입은 의사 선생님을 만났고, 분리배출을 하는 날이면 환경미화원을 보았으며, 등하굣길에는 하수구를 고치는 정비사를, 뉴스를 틀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하는 아나운서를 보았다. 그리고 그들이 보여주는 전형적인 삶을 어느 순간 '정답'으로 인식하고 살아간다.
정답도 다 같은 정답은 아니다. 그 위에 얹어지는 이런저런 말들이 있다. 흔히 '이 직업을 하면 인생이 핀다'든가 '저 직업을 하면 <인생이 망한다>'든가 하는 이야기다. 나는 의도치 않게 이런 말들을 들으면서 망한 인생은 절대 살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망한 인생이 무엇인지 스스로 생각해보지도 않은 채, 그저 그들이 말하는 정형화된 '망한 인생'을 회피하여 살고 싶었다.
좋은 인생, 그렇지 않은 인생에 대한 기준이 있는가?
우리는 이미 모두 답을 알고 있다. 그건 당연히. 정말 당연히, '사람마다 다르다'.
독립운동가의 삶은 좋은 삶인가? 돈 한 푼 없는 거지의 인생은 좋은가? 억만장자의 삶이 좋은 것인가? 그건 아무도 단정할 수가 없다. 마치 빨간색은 좋은가? 하얀색은 좋은가? 와 같은 이야기일 뿐이다. 스스로 느끼는 인생의 어떠한 지점에 따라, 내가 의미를 두는 방향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그 의미를 부여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율성'이라고 생각한다. 진부한 말일지도 모르지만 정말이다. 그 삶의 의미를, 나아가 내가 방점을 두는 어떠한 지점을 내가 부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적어도 나 자신이 그렇게 느껴야 한다는 말과 같다. 나 자신이 의미를 두는 일이라고 생각해도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나를 둘러싼 사방의 요소들은 결국은 나의 자아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럴지라도 '나의 인생'이라고 내가 느껴야 한다.
내 삶의 의미를 스스로 고민해보지 않은 사람은 환경에 잡아먹혀 버리고 만다. 그리고 남들이 말해주는 '삶의 의미'를 명확한 '정답'이라고 여기며 살아간다. 흔히 말하는 이런 것이다.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해(입시 공부를 말한다)-> 좋은 대학에 가야 해-> 회계사? 변호사? 엔지니어? 요즘은 ai시대라 이런 게 좋다더라-> 돈을 많이 벌어야 해-> 결혼해야 해->...
그리고 어느 한 단계를 이탈할 때마다 엄습하는 불안감을 이기지 못한다. 정답에서 이탈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인생이 오답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사고의 과정을 밟아 온 사람들이 편협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스스로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지 고민조차 하지 않고, 남의 전철을 밟다가 뒤늦게
"너무 남의 말만 듣고 살았어."
라는 이야기를 꺼내는 어느 순간의 누군가에게 말하는 것이다.
대학에 못 가면 인생이 망하는 줄 알았다. 공부를 하지 않고 기술을 배우는 친구들을 보면, '적어도 내가 더 미래에 형편이 낫겠지.' 이런 생각을 했다. 그 생각이 이렇게 어리석은 것인 줄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알지 못했다.
내 인생의 조종사는 나다. 막연하기까지 한 파도 속에서 "이제 다음은 어디예요? 어디로 가야 해요?"라고 물으면 아무도 답해 줄 사람이 없다.
파도를 넘어 저 큰 대양을 바라보자. 그 대양의 한가운데서 이제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조종키를 잡고, 핸들을 돌리는 그 순간에서야 비로소 인생이라는 배의 주인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