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불편하게 살자, 나만의 장소는 꼭 있다
대한민국 인구가 가장 많이 몰려 있는 서울에 직장을 두고 있다 보니 출퇴근하는 동안 참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 그들 가운데 ‘저 사람은 정말 된 사람’이라고 느껴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눈치·염치 모두 없이 사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많다. 사실 더욱 감정적으로 대하는 쪽은 후자이기 때문에, 그들이 더 많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최근 그런 사람들로 인해 기분 상한 일을 자주 겪었다. 살면서 얻은 스트레스 때문에 예민해져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주 기분을 버리는 원인이 나한테만 있는 것 아닌 듯하다.
마주치면 기분 나빠지는 부류 가운데 하나는 공공장소를 자신만의 공간처럼 사용하는 사람들이다. 공공장소를 사유화하는 사람들은 예를 들어 길거리를 걸어 다니며 담배를 피우거나, 함께 있는 사람들과 큰 목소리로 욕지거리를 내뱉는다. 전철 안에서 타인 시선에 아랑곳없이 큰 목소리로 옆 사람과 떠들거나 통화하고, 커다란 가방을 뒤로 매 다른 사람들이 서 있을 공간을 줄인다. 여러 사람과 마주쳐 지나다니는 길에서 마스크를 안 쓰고 있다든지, 피트니스 클럽에서 들고 있던 바벨을 땅에 던지듯 내려놓아 소음을 일으킨다.
또 누군가는 산책로에서 반려견의 목줄을 매지 않거나 길게 늘어뜨린 채 걸어가고, 아무데서나 침 뱉는다. 카페나 식당에서 신발을 신은 채 의자에 발을 올려놓고, 도로 추월차선에서 정속 주행해 교통 흐름을 저해한다. 주차칸에 맞춰 차를 대놓지 않아 다른 사람들이 주차장을 편하게 이용하지 못하게 하고, 타인의 신체를 아무렇지 않은 듯 건드린다. 나로선 적잖이 당황스러운 세태다.
공공장소에서 타인을 불쾌하게 만드는 건 ‘사생활 침해’
개인이 공공장소에서 아무렇게나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는 것은 법적으로 올바른 모습일 뿐 아니라 각자 지켜야 할 하나의 도리다. 국립국어원에 따르면 공공장소의 사전적 의미는 ‘사회의 여러 사람 또는 여러 단체에 공동으로 속하거나 이용되는 곳’이다. 국가가 지자체가 시민들에게 개방한 영역이나, 카페 같이 사유화했지만 불특정 다수에 개방된 구역에서는 특정 개인이 해당 장소에 도입된 제도나 규칙을 벗어난 행위를 자유롭게 벌일 수 없다.
공공장소의 정의는 한편 제도·규칙의 테두리 안에서는 각자의 권리가 보장돼야 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공공장소를 자기 것처럼 사용하는 사람들이 일으키는 문제는 해당 구역에 적용된 일련의 명시적·암묵적 규칙을 위반할 뿐 아니라 타인의 사생활을 침범하는 점이다. 그들의 특정 행동이 내 기분을 상하게 만든 건 다시 말해 나의 사생활을 침해한 것과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다.
현행법과 방송계 등 분야에서도 개인의 부정적 감정을 유발하는 언행을 사생활 침해로 간주한다. 법제처 홈페이지에 게재된 지난 2003년 헌법재판소 판결에 따르면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가 보호하는 것으로 개인 비밀, 사생활 불가침, 양심·성적(性的) 영역뿐 아니라 인격적인 감정 세계를 존중받을 권리와 정신적 내면 생활이 침해받지 않을 권리 등이 꼽힌다.
또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지난 2018년 발간한 보고서 ‘방송심의에서의 권리침해금지 기준 적용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프라이버시는 개인의 사생활이나 사적인 일과 관련해서 개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공개되거나 ‘간섭’ 받지 않을 자유를 뜻한다. 단지 ‘개인의 주관적 감정이 손상’되는 경우에도 프라이버시 침해가 성립되는 것으로 본다.
방통심의위가 정의 내린 프라이버시는 방송을 통해 개인 사생활이 알려지는 현상을 전제로 하는 개념이다. 다만 개인이 사적인 일로 간섭 받음에 따라 감정을 다치지 않아야 한다는 관점은 더욱 폭넓은 의미에서 해석할 수 있다. 개인 영역을 침범당했을 때 다른 사람들의 판단과는 별개로 해당 인물이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도록 만드는 것은 잘못된 행위라고 동일하게 지적하기 때문이다.
나를 기분 나쁘게 한 사람들이 어떤 의도로 그랬는지는 내게 부차적인 문제다. 그 사람이 자신의 행동으로 타인의 감정을 손상시킬 수 있음을 인지한다면 되도록 그런 행동을 자제하지 않았을까,라고 상상했을 때 그의 무신경함에 더욱 화난다.
모르고 한 행동이라고 용서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는다. 한국인 누구나 초등교육을 의무적으로 이수할 때부터 자신의 언행이 누군가의 일상에 작고 큰 지장을 줄 수 있단 사실을 배운다. ‘이럴 땐 이렇게 해라’라는 상황별·장소별 에티켓까지 교육받는다.
당신이 너무 불편하지만, 떠나는 건 내 몫
‘반대로 내가 그 일을 겪는대도 아무렇지 않은데요? 당신이 너무 예민한 것 아닌가요’라고 반문하는 사람은 타인과 공감하지 못하든, 알면서도 반박을 위한 반박을 하는 것이든 불쌍한 사람이다. 그렇게 살다 나보다 더 예민하고 과격한 사람 만나 된통 당하길 바라는 마음까지 불러일으키는 등, 존중받기는커녕 누군가로부터 저주받으며 사는 사람이지 않나.
다만 헌재가 표현한 인격적인 감정 세계나 정신적 내면 생활 등은 매우 추상적이고 주관적인 개념인 점에서 애매모호한 점에서 지적받을 수 있다. 이에 대해 보호받기 위해선 해당 개념들이 존중받지 못하거나 침해됐음을 객관적으로 입증해 보일 수 있는 증거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불가능할 경우 사생활을 침해당한 나의 상황을 이해하고 자발적으로 존중해줄 사람들만 만나길 바라는 수밖에 없다. 또는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라는 논리를 따라야 한다. 나를 불편하게 만든 사람에게 괜히 힘 들여서 항의하거나 그 사람을 쫓으려 하는 것은 헛된 수고이니, 분하지만 내가 자리를 뜨는 게 상책이기 때문이다.
사실 나조차 완벽한 사람은 아니다. 다만 나와, 나를 불쾌하게 만든 사람들의 차이는 공공장소에서 타인의 사생활을 침해할 수 있음을 인지하느냐 여부다. 그런 언행을 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결국 그랬을 경우 반성하고 반복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만으로 다른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 수 있지 않나.
하지만 나의 이런 노력이나 고민들은 혼자만의 착각에서 시작된, 괜한 노력일 수도 있는 게 사실이다. 세상의 많은 장소들의 성질이 갈수록 다변화하는 동시에 사람들의 가치관은 다각화하고 있다. 옳고 그름의 기준은 시시각각 달라지는 유연성을 지닌다. 타인의 행동에 불편함을 느끼는 심정을 두고도 올바름을 추구하는 것이라거나 반대로 구시대적 발상이라고 보는 등 두 가지 관점이 존재한다. 이 두 관점은 수많은 신념들 사이에서 갈수록 심각하게 반목하고 있다. 한편 내 신념과 논리에도 허점이나 모순이 존재할 수 있다.
우리는 앞으로도 어쩔 수 없이 타인에게 잘못하곤 이를 뉘우치거나 또는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살아갈 터다. 반대로 정작 타인이 괘념치 않는 나의 언행을 두고 자책하길 반복하며 지낼 수 있다.
힘들더라도 나와 남 모두가 조금은 불편하고 어렵게 살았으면 하는 게 내 바람이다. 같은 공간에 있는 사람들을 서로 존중하기 위해 고심하고 필요한 행동을 옮기는 삶을 보냈으면 한다. 우리는 타인을 존중하느라 지친 몸과 마음을 옳은 방식으로 달래고 돌볼 수 있다. 타인을 존중하는 태도가 때론 자신을 치유할 수도 있다. 지금보다 조금만 더 불편하게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