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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로맑음 스튜디오 Jan 02. 2023

갑자기 올레길

가게 옆자리의 할아버지가 추천한 올레길 걷기 여행

  8일 휴가를 갖는 것까진 좋았는데 아무런 계획도 하지 않고 제주도 월정리 단 한 곳에서만 지낼 생각을 한 것은 좋은 게 아니었다고 문득 생각이 들었다. 제주도에 온 지 6일째가 된 날 아침에 든 생각이었다. '이 멍청이야, 깨닫는 타이밍이 너무 늦잖아'라고 이어 생각했다. 계획도 안 갖고, 어딜 가지도 않고 먹기만 하면서 6일 정도 지나니까 도무지 할 게 없었다. 겨울의 제주는 문을 닫는 가게가 많은 데다가 사람도 적었다. 새해를 맞이하려고 바에 들어가 1월 1일 0시 0분을 맞이할 때까지 직원들과 나 밖에 없어서 직원들과 잔을 맞대었다.



  결국 일을 안 하겠다는 선언을 깨고 작업을 했다. 미뤄놨던 서로맑음 포트폴리오 웹사이트의 관리자페이지를 만들고, 과도한 서버 사용을 줄이기 위해 개발 서버와 운영 서버를 분리했다. API 키들을 숨기기 위한 보안강화도 신경 썼다. 오랜만에 개발자스러운 일들을 했다. 아침에 일어나 씻고 밥을 먹고 카페에서 일을 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앞서 고심하던 을 결정하고 나니까 마음이 후련하여 작업이 잘 되었다. 아침의 안개가 걷히고 새해의 태양이 봉긋 솟아오르듯 정신이 또렷했다. 숙취 때문에 속은 좀 안 좋았다.



  새해 점심으로는 해장 겸 고사리 육개장을 맛봤다. 살짝 죽같이 걸쭉한 육개장 국물 안에 북북 잘게 찢은 것 같은 고사리들이 숨어있었다. 얼큰하고 고소했다. 일주일간 흑돼지, 갈치솥밥, 통닭, 고기국수, 돔베고기, 고등어구이, 딱새우회, 소고기우동 등 맘껏 먹어치웠지만 일주일 만에 맛이 지루해졌다. '와서 한 번쯤 먹어볼 만한' 음식들은 모두 한 번 먹고 난 뒤엔 당분간 먹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고사리 육개장은 그중 가장 맛있었다고 단언한다. 주인장이 직접 만든 강된장과 젓갈은 또 어찌나 맛있던지! 쌈채소에 찍어먹었을 뿐인데 고기못지않았다. 공기밥 두 그릇을 먹어치우곤 또 근처의 바다가 보이는 카페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나이 들어 주책이네요, 젊은이들만 보면 말을 계속 걸어요. 허허."

옆자리에 앉아있던 등산객 차림의 노부부가 말했다. 주인장과 대화를 하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나에게도 이것저것 질문하기 시작했다. 제주에는 언제, 어떻게 왔냐, 어디 어디 갔냐 등 물었다. 나는 생각할 게 많고 쉬어본 적 없었고 일주일 전에 물어봐서 월정리에서만 지내고 있다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달리 할 게 없다면 올레길을 돌아보는 건 어때요?"라고 노인이 물었다.

  제주 올레길은 총 20코스가 넘는 제주를 아우르는 걷기 길이다. 한 코스당 보통 10km가 넘으니 그야말로 걷기 예찬을 위한 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별로 내키질 않아 적당히 인사드리고 숙소로 걸어 돌아왔다. 침대에 이제는 익숙한 천장을 바라보게 누웠다. 이제는 전구 안의 굴절도 보일 지경이었다. 어떻게 얻은 여유인데 일주일이 되었다고 그새 지루해지다니. 그제야 마음이 들끓어 임계점을 넘었다. 바로 했어야 할 대답을 토해냈다.



  '그러게요? 그거 좋은 생각인 것 같습니다. 바로 걸어볼게요!'

나는 외투와 모자를 챙기며 일어났다.


  그렇게 나는 무작정 올레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걷기로 한 길은 20번째 코스로 총 17.6km의 길이었다. 신고 나온 신발이 하필 컨버스화였는데도 걷기에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무턱대고 출발했다. 게다가 나는 올레길을 처음 걸어보았기 때문에 이 정도 길이인 줄도 모르고 다 걷고 나면 근처 카페에 들르려고 맥북과 읽을 책을 들고 나왔다. 중간쯤 가고 나서야 이런 짐을 가져온 걸 후회했다. '이 멍청이야, 깨닫는 타이밍이 너무 늦잖아!'



  쭉 걸어 보고 나니 올레길의 표시를 알려주는 띠, 간세, 표지판이 눈에 잘 보이기 시작했다. 평소 어디를 목표하여 걷기 시작한다면 지도앱의 화면을 보기 일쑤이다. 하지만 올레길의 특징은 띠와 표지판을 보며 따라가도 어렵지 않게 따라갈 수 있었다. 또한, 이게 주변을 더 둘려보게 만들었다. 행여나 '이 길이 맞아? 정말 여기로 가면 돼?' 싶더라도 거기에 띠와 표지판이 있다면, 의심하지 않아도 된다. 그 길이 맞다. 올레길은 돌길, 풀길, 아스팔트길, 모래길, 물길, 오르막길 등 다양하게 제주도를 온갖 틈새 같은 길을 걷게 만든다.



'정말 이 길이 맞아?' 싶었을 때


  "아까 점심 먹던 학생이네?"

올레길 중간에서 쉴 수 있는 벤치에 앉은 할머니가 말했다. 아까 고사리 육개장을 먹었던 식당에서 만난 부부였다! 나보다 먼저 출발을 했는데 그러다 또 만나게 된 것이다.


  "아까 제가 한 말 듣고 정말 올레길을 걷기로 한 거예요?" 할아버지가 물었다.

"네, 월정리 바다는 많이 봤고 저는 걷는 게 좋아서요" 나는 바로 대답했다. 내가 가게에 나와 노부부는 바로 출발하여 마주친 것이다. 벤치에 따라 앉아 식당에서 이어 하지 않았던 이야기들을 했다. 이 노부부는 알고 보니 이번 새해로 칠순이 된 사람들로, 5년 동안 올레길을 여름과 겨울을 번갈아 걸어왔고 이번에 20, 21코스를 마무리로 종주를 하신다.

  "올해 70이요? 진짜 그렇게 안 보이세요." 나는 진심으로 말했다. 아무리 100세 시대라지만 그 절반의 영혼이 기울어도 이런 길을 걸을 의지가 남아있다니. 이런 코스 20곳을 종주하는 분들이라니.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이야기하며 충분히 쉬었을 때, 남은 길을 이 노부부와 동행하기로 했다.




  올레길은 바닷길을 테두리로 감싸 안은 제주도 안쪽에 숨은 것들을 보게 해 주었다. 돌담길을 사이를 지나는 농기구, 당근을 먹는 말, 엄청나게 얇은 대나무 숲.

  "저거는 뭘 심은 건가요?" 아무 쪽 밭을 가리키며 동행하는 할아버지께 물어보면

  "저거는 당근이고, 아까는 감자고. 옆에 쪽파도 심었네요"라고 하셨다.

나한텐 그냥 다 녹색이었다. 뭔지도 모르면서 가지런한 녹색 밭을 보고는 사진을 찍었다. 누군가 내게 물었다면 "녹엽을 심었네요" 했을 게다. 노부부와 동행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이다.



  걸으면서 제주에 대한 얘기뿐만 아니라 각자 삶에 대해, 서로 다른 시대상에 대해, 그렇고 그런 생각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올레길에서 이야기하며 걷는 즐거움도 이 노부부와 동행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터다. 갈대밭이 보였을 때는 내게 사진을 찍어주겠다며 내 스마트폰을 줘보라고 했다. 나는 원체 스스로 사진을 잘 찍질 않아서 이번 여행에도 내 사진이 별로 없었다. 누가 먼저 내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한 것은 이번 여행에서 처음이었다.



  바람이 많이 불 때 할아버지는 셔터를 눌렀다. 앞머리는 바람에 날려 이마를 보이고, 나는 열심히 걷느라 땀 맺힌 피부와 피로한 눈가. 분명 내가 멋진 사진은 아니었다. 하지만 마음에는 들었다. 길을 부단히 걷는 사람으로 보이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나는 이런 모습도 있었구나'하여 프로필 사진으로 해놓았다. 이 또한 이 노부부와 동행하지 않았다면 몰랐겠지.




  그렇게 올레길 20코스를 종주하고 우리는 서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하면서 헤어졌다. 시간을 확인해보니 두 시간을 족히 넘게 걸었다. 만보기를 확인해보니 2만보를 넘게 걸었다. 저녁 먹을 때가 되어 '1월 1일, 떡만둣국 팝니다'라고 적힌 국숫집을 보고는 들어갔다. 새해를 맞이하는 현지 아주머니들이 깔깔대며 만찬을 즐기고 있었다.



  옆에 조용히 앉아 푸짐한 떡만둣국을 먹었다. 시린 마음이 사르르 녹고, 긴장이 풀렸는지 다리가 저렸다. 하지만 따뜻했다. 숙소로 돌아갈 땐 버스를 타고 돌아왔다. 버스를 내리자 하늘에 수 놓인 별들이 몇 개 보였다. '이렇게 한 살을 먹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새해에 일출은 보지도 않고 갑자기 올레길을 걸었지만 그 길을 걸은 경험이, 내가 본 풍경이 오롯이 내 것인 느낌이었다. 종종 떠오를 것 같은 새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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