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나의 어머니는 자식들의 울음을 끔찍이 싫어했다. 자식들을 엄하게 혼내는 경우, 동생과 나는 ‘잘잘못’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 억울해서 터뜨린 ‘울음’ 때문에 더 크게 혼이 났다. ‘뚝, 그쳐!’ 이 말은 회초리보다 무서운 명령이었다. 당시 어머니가 할 수 있는 훈육의 방식이었겠지만, 나로서는 도무지 어머니의 사랑을 느낄 수 없었다. 어머니는 당신의 딸들이 허투루 울지 않고 살기를 바랐다.
어머니가 펑펑 운 걸 처음 본 적이 있다. 임종 직후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날이었는데, 이날 외할머니의 죽음보다 어머니의 통곡이 중학생인 어린 나에게 세게 꽂혔다. 그것은 고스란히 ‘엄마’를 잃은 한 아이의 슬픔이었다. 울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울음을 감춰 둔 어머니의 두 눈덩이가 퉁퉁 부어올랐고, 못내 그런 ‘아이’가 불쌍했다. 외할머니 장례를 치르는 동안 나는, 우는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이후 어머니가 그토록 운 걸 본 적이 없다.
외할머니가 생전 아꼈던 것은 비료값도 약값도 아니었다. 외손녀의 어린 눈으로 보자면, 외할머니는 일만 하는 늙고 마른 소였다. 가난한 농촌의 살림살이였고 아낄 게 참 많았다지만, 구슬픈 울음과 호탕한 웃음 한 가락이 아까웠을까. 소리 내어 울지 않는 법에 능숙한 사람은 소리 내어 아픈 법에도 인색한 것인지, 나는 외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그가 지독한 병마와 싸웠다는 걸 까마득히 몰랐다. 구부정한 산 능선으로 하루 해가 사라질 때까지 그 메마른 너른 논밭에서 외할머니가 파내고 파묻은 건 무엇이었을까.
오래전, 어머니가 외할머니를 떠나보냈듯이 9년 전 나는 어머니를 떠나보냈다. 7월이 오면 유독, 이 두 분이 그리운 이유는 바로 매미 울음 때문이다. 나는 ‘우는 법’을 잘 아는 매미가 참 좋다. 도통 모습을 드러내지 않지만 울음으로 그들이 거기 있다는 걸 안다. 이면우 시인의 말대로 어쩌면 “사람들이 울지 않으니까/ 분하고 억울해도 문 닫고 에어컨 켜 놓고 TV 보며/ 울어도 소리 없이 우니까”(「매미들」) 우리를 대신하여 매미들이 울어주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문정희 시인은 “이 세상 사람들의 울음/ 까무러치게 대신 우는 법/ 알아야 하리”(「곡비」)라고 노래했지만, 그러나 대신 울어주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우리가 ‘아이’였을 때 자기 울음을 온전히 품어준, 단 한 번의 체험이 우리에게 이토록 소중한 까닭이다.
고백하자면, 9살과 7살 두 아이를 기르는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가장 어려웠던 건 아이들 울음을 들어주는 일이었다. 아이가 내 말에 복종하듯 울음을 뚝, 그치는 게 결코 능사가 아니라는 걸 잘 알기에 울음에 관해서만큼은 나는 신중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어떻게 ‘당신들’의 대물림을 끊을 수 있을까.
일단 나는 아이가 울면 ‘울지 마!’라고 말하지 않는다. 흘러나오는 아이 감정의 수도꼭지를 잠그지 않는다. 울음은 사람의 체기를 뚫는 소화제 같은 것이어서 언제든 꺼내 먹을 수 있게 아이들 호주머니에 상비약처럼 챙겨 넣어 준다. 울고 싶을 땐 언제 끝날지 모르는 태평소 시나위처럼 실컷 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나의 아이들이 매미처럼 잘 우는 사람으로 컸으면 좋겠다. 우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 ‘울고 있는 사람’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으니까.
혹여나 울음을 배우지 못한 당신이라면 7월, 매미들로부터 ‘우는 법’을 수강하기를 권해 본다. 창문을 열어 보라. 이 울음들, 무료라니, 이 얼마나 화통한가. 매미가 사라진 여름을 상상할 수 없다면 우리는 이미 울음을 사랑하고 있는 게 아닐까. 나는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여름마다 매미로 환생했으면 좋겠다. 여름이 오면, 벚나무 참나무 곁으로 가서 귀를 열어두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