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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드 Jul 26. 2024

울음을 배우는 계절


눈물 자국


‘울지 마!’


어린 시절, 나의 어머니는 자식들의 울음을 끔찍이 싫어했다. 자식들을 엄하게 혼내는 경우, 동생과 나는 ‘잘잘못’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 억울해서 터뜨린 ‘울음’ 때문에 더 크게 혼이 났다. ‘뚝, 그쳐!’ 이 말은 회초리보다 무서운 명령이었다. 당시 어머니가 할 수 있는 훈육의 방식이었겠지만, 나로서는 도무지 어머니의 사랑을 느낄 수 없었다. 어머니는 당신의 딸들이 허투루 울지 않고 살기를 바랐다.


어머니가 펑펑 운 걸 처음 본 적이 있다. 임종 직후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날이었는데, 이날 외할머니의 죽음보다 어머니의 통곡이 중학생인 어린 나에게 세게 꽂혔다. 그것은 고스란히 ‘엄마’를 잃은 한 아이의 슬픔이었다. 울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울음을 감춰 둔 어머니의 두 눈덩이가 퉁퉁 부어올랐고, 못내 그런 ‘아이’가 불쌍했다. 외할머니 장례를 치르는 동안 나는, 우는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이후 어머니가 그토록 운 걸 본 적이 없다.


외할머니가 생전 아꼈던 것은 비료값도 약값도 아니었다. 외손녀의 어린 눈으로 보자면, 외할머니는 일만 하는 늙고 마른 소였다. 가난한 농촌의 살림살이였고 아낄 게 참 많았다지만, 구슬픈 울음과 호탕한 웃음 한 가락이 아까웠을까. 소리 내어 울지 않는 법에 능숙한 사람은 소리 내어 아픈 법에도 인색한 것인지, 나는 외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그가 지독한 병마와 싸웠다는 걸 까마득히 몰랐다. 구부정한 산 능선으로 하루 해가 사라질 때까지 그 메마른 너른 논밭에서 외할머니가 파내고 파묻은 건 무엇이었을까.


오래전, 어머니가 외할머니를 떠나보냈듯이 9년 전 나는 어머니를 떠나보냈다. 7월이 오면 유독, 이 두 분이 그리운 이유는 바로 매미 울음 때문이다. 나는 ‘우는 법’을 잘 아는 매미가 참 좋다. 도통 모습을 드러내지 않지만 울음으로 그들이 거기 있다는 걸 안다. 이면우 시인의 말대로 어쩌면 “사람들이 울지 않으니까/ 분하고 억울해도 문 닫고 에어컨 켜 놓고 TV 보며/ 울어도 소리 없이 우니까”(「매미들」) 우리를 대신하여 매미들이 울어주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문정희 시인은 “이 세상 사람들의 울음/ 까무러치게 대신 우는 법/ 알아야 하리”(「곡비」)라고 노래했지만, 그러나 대신 울어주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우리가 ‘아이’였을 때 자기 울음을 온전히 품어준, 단 한 번의 체험이 우리에게 이토록 소중한 까닭이다.


고백하자면, 9살과 7살 두 아이를 기르는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가장 어려웠던 건 아이들 울음을 들어주는 일이었다. 아이가 내 말에 복종하듯 울음을 뚝, 그치는 게 결코 능사가 아니라는 걸 잘 알기에 울음에 관해서만큼은 나는 신중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어떻게 ‘당신들’의 대물림을 끊을 수 있을까.


일단 나는 아이가 울면 ‘울지 마!’라고 말하지 않는다. 흘러나오는 아이 감정의 수도꼭지를 잠그지 않는다. 울음은 사람의 체기를 뚫는 소화제 같은 것이어서 언제든 꺼내 먹을 수 있게 아이들 호주머니에 상비약처럼 챙겨 넣어 준다. 울고 싶을 땐 언제 끝날지 모르는 태평소 시나위처럼 실컷 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나의 아이들이 매미처럼 잘 우는 사람으로 컸으면 좋겠다. 우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 ‘울고 있는 사람’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으니까.


혹여나 울음을 배우지 못한 당신이라면 7월, 매미들로부터 ‘우는 법’을 수강하기를 권해 본다. 창문을 열어 보라. 이 울음들, 무료라니, 이 얼마나 화통한가. 매미가 사라진 여름을 상상할 수 없다면 우리는 이미 울음을 사랑하고 있는 게 아닐까. 나는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여름마다 매미로 환생했으면 좋겠다. 여름이 오면, 벚나무 참나무 곁으로 가서 귀를 열어두는 이유다.


흔한 울음 다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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