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론 머스크라는 퍼즐
폭발적인 성장에 필요한 것은 사실 광기이다. 스타트업 역시 창업가들과 초기 멤버들의 광기에 기대어 성장한다. 그런 측면에서 대한민국은 휴전이래 집단적인 광기 아래에서 폭발적인 성장을 할 수 있었다. 나라 전체가 스타트업 같은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스타트업적인 혼돈과 경쟁과 과로와 과몰입은 전국적인 현상이었다고 할 것이다. 우리는 이제 그 체제를 서서히 빠져나오고 있다. 한국에서의 개발독재가 성공적이었던 것은 치욕의 역사의 전환을 위하여 그러한 집단광기가 필요하다고 구성원들 간에 어느 정도의 동의가 있엇을 것이다. 물론 동조의 목소리만 있었다면 우리는 정말로 모두가 미쳐버린 나라가 되었을 것이다. 다행히도 한국의 인민대중은 나름의 균형점을 찾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여 왔다.
머스크의 트위터 인수를 보면서 드는 생각은, 나는 그의 트위터 개혁이 성공할 수도 있을 것으로 보여서 조금 무섭다. 머스크야 말로 개발독재적 광기에 의하여 기업을 일으키고 자신과 같은 헌신을 모든 구성원에게서 요구하는 그야말로 전염적 집단광기의 신봉자이기 때문이고, 이런 그의 광기가 성과를 내는 모습을 보여주면 그것은 우리가 추구하는 지향점에 있어서 보다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집단광기 형성의 요구에 부합하지 못하는 구성원을 배제하고 이에 부응해 줄 수 있는 구성원으로만 회사를 다시 꾸리는 것은 사실 트위터를 집단광기에 휩싸여 구성원 모두가 물불 가리지 않는 초기의 스타트업적 분위기로 되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업의 규모가 커지고 인적 구성이 다양해짐에 따라서 발생하는 관성과 안일함 그리고 주저함에 따른 비효율에 대한 해결책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구성원들이 자신들이 이미 그 성장에 기여한 바 있는 회사에 언제까지나 무한정으로 사그러들지 않는 헌신으로 살아갈 수는 없다. 그렇게 살기에는 개별적인 인간의 삶은 너무나도 짧다. 물론 그들에게는 선택의 기회가 있다. 다른 문화의 기업으로 이직하는 것. 하지만 그들에게 선택을 하도록 하는 것은 과연 온당한 것인가. 머스크는 스스로 그런 삶을 선택하였다. (아마 그는 그런 것 이외의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닐 것이므로 선택이라는 단어는 틀린 것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 정도로 거대해진 회사에서 다른 구성원들이 어떠한 개인의 판단에 따라 일방적으로 그러한 영향을 수용해야만 하는 것이 맞는 것인가.
사실 그래해야 한다는 것이 자본주의적 질서이기도 하다.
좋은 기업이란 무엇인가?
사회의 문제를 기업가적 창의와 근성으로 해결하는 것이 좋은 기업인가. 아니면 사업기능을 문제 없는 수준에서 처리하면서 그 구성원들에게는 안정적인 삶의 기반을, 주주들에게는 꾸준한 성장을 제공하는 것이 좋은 기업인가.
머스크는 거시적인 측면에서 사회(와 인류)가 필요로 하는 기능들이 무엇인지 식별하고, 이를 위하여 필요한 인적 물적 자원을 동원하고 사람들을 설득하여 수요와 공급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탁월하다. 그가 거시적 측면에서 추구하는 가치들은 '악하다'고 하기도 어려운 것들이다. 다만 미시의 측면에서 그는 악마적 수단을 동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목표가 합당하므로 그 수단은 부차적인 것일 뿐이니까. 또 그가 축적한 부의 거대함에 따라서, 아주 공적인 어젠다들이 개인의 결단에 따라서 방향성이 결정되는 것은 온당한가.
여기서 우리는 딜레마적 상황을 마주한다. 머스크의 방법론은 (성공한) 개발독재의 방법론과 다르지 않다. 그것은 때로는 악마적 방법을 통하여 공공의 필요들을 해결한다. 우리는 그로부터 발생하는 과실을 수취해야 하는가 거부해야 하는가.
아무튼 나는 머스크의 때로는 영웅적 분투와, 그의 끝을 모르는 광기와, 한 개인에게 너무 많은 공적 영향력이 누적되었음에 대한 경계와, 안이해진 조직에 새로움을 주입할 수 있는 그의 역량에 어떠한 판단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게 되었다.
오늘의 광기어린 일기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