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컬한, 깊이 시니컬한
*이야기 자체를 논하는 것은 아니나 물론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0. 들어가면서
봉준호의 영화를 사실 나는 많이 보지 않았다. 플란다스의 개는 소문으로만 들었을 뿐이고, 살인의 추억이라든지 옥자라든지 마더라든지 등등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만한 것들도 보지 않았다. 따라서 그의 작품세계를 논하기에는 배경지식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나마 내가 보았던 것은 '괴물'이나 '설국열차'였는데, 재미있게는 보았으나 이 영화들이 왜 그렇게나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었는지는 잘 와 닿지 않았다. 충분히 좋은 영화들이었지만, 전자는 우리가 한국에 대해서 모르고 있던 새로운 이야기를 해준 것이 무엇이 있나 싶었고, 두 번째는 사실 원작에 기반한 영화로 온전히 봉준호의 영화라고 보기는 힘들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할만한 원작을 발굴하고, 그것을 스크린에 설득력 있게 옮긴 그의 실력이 대단함은 잘 알겠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봉 첫날 심야로 본, 기생충은 꽤나 묵직하게 맞은 느낌을 주는 영화였다. 영화가 끝나는 시점에서 드는 말하기 힘든 찜찜함. 서사의 뼈대만 추려서 누군가에게 들려준다면 그냥 블랙코미디처럼 들릴 것인데, 관람한 입장에서는 전혀 웃지 않게 되는 그런 막막함.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희극적이나 그 본질은 실상 비극인, 존재의 처참함. 뭐 그런 것.
1. 시니컬함
봉준호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표면적으로 형성된 관계 이면의 내적 동기의 뒤틀림을 노출시키는 능력이 탁월하다. 한편, 그의 서사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은 평면적이지 않으면서도 (사회) 구조상에서 자신이 점유하는 위치에서 기대되는 역할을, 마치 역할극이라도 하듯이, 잘 따르는 모습을 또한 보여주기도 한다. 일견 모순되는 것 같은 이러한 인물 묘사가 그가 창조한 캐릭터들이 개성을 상실하지 않으면서도 어떤 특정한 사회계층에 대한 상징성을 보여줄 수 있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요컨대 한 인간은 그가 지금까지 살아온 개인사의 총합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며, 그 과정에서 축적한 고유한 뒤틀림 들은 그가 위치한 환경으로부터 습득한 "환경의 반영"인 동시에 그의 내면을 구성하는 개성의 요소로서 "개별화 요소"이기도 하다는 점을 봉준호는 잘 드러내는데, 그 과정에서 우리가 "이성적", "합리적"이라고 표현할 수 없는 요소들이 내면화될 수밖에 없음을 그는 너무나도 잘 활용한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우리는 그에게서 속시원한 서사를 기대할 수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세상을 구성하는 사람들은 결국 각자의 위치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체득하게 되는 자신의 고유한 뒤틀림에 따라 행동하는데 이 행동들은 윤리로써 설명될 수 없고, 결코 미학적으로도 아름다울 수만은 없는 것들일 수밖에 없고 이것을 외부에서 관찰하게 되면 이는 "광기"로 뿐이 보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가 관찰하는 인간들은 이러한 광기 속에서 적당히 이를 감추면서 세상과 타협하며 살아가려 노력하는 사람들일 수밖에 없고, 그것을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지점에서 그의 이야기가 촉발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인간상은 그리고 그의 영화는 극히 시니컬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아마 보는 내내 가슴이 답답해져 오는 것은 그의 그런 시니컬한 인간관/세계관을 손쉽게 부정하기가 어렵기 때문인 것 같다. 보다 정확히는 그의 영화에서 묘사되는 '뒤틀려 있으면서도 정작 본인은 자신의 뒤틀림을 잘 인지하지 못하는 개별적 인간들'의 군상이 거울을 보면 마주하는 나의 모습과 다르지 않아 순간 심장이 덜컥 가라앉기 때문일 것이다.
2. 구조를 다루되, 접근은 매우 미시적으로
봉준호 영화를 볼 때면 느끼던 당혹스러운 감정은 앞의 이야기의 연장선 상에서 발생한다. 조금 거칠게 정리해보자면, 그는 항상 뒤틀린 구조를 노출시키는 이야기를 함에 있어 사람들의 아주 미시적인 개인사를 활용하는데, 여기서 바로 그 불편함의 감정이 시작된다. 뒤틀린 구조에서 비롯된 사람들의 왜곡된 동기와 그에 따른 '광기 어린' 행동들은 구조의 산물인 동시에 아주 고유한 개인의 영역에서 발생하는 일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문제의식은 구조를 향하고 있되, 우리는 그의 서사의 내재적인 해석으로는 쉬이 그에 대한 해결책을 발견할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영화는 카타르시스를 주는 영화일 수가 없는 것이다.
반면, 아마도 같은 이유에서 우리는 그의 영화를 현실적이라고 느끼는 것 같고,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공감 포인트도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가 실제로 마주하는 현실은 너저분하고, 서로의 이해가 교차하고, 표면적으로 아름답다고 느껴졌던 것들이 사실은 추함을 가리고 있을 뿐일 때가 많으며, 이러한 공식에서 나도, 그 누구도 예외는 아니란 것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초반부터 위태롭게 쌓여가던 인물들 간의 긴장관계가 한꺼번에 폭발하는 배경이 햇살이 따사롭게 쏟아지는 일요일 낮에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모여서 즐거운 식사를 나누는 누군가의 생일파티의 현장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 그것이 서사적 긴장의 폭발과 대조하기에 좋은 배경이었던 이유도 있겠지만, 표면과 이면의 모순적 긴장관계가 더 이상 가려질 수 없었던 순간이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니까, 개개인의 뒤틀림이 구조가 요구하는 역할 수행의 압력을 초과하는 순간, 우리는 구조의 안정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3. 제3계급, 그 외 계급
이러한 구조와 개인의 긴장관계는 계급 간의 극적 갈등을 통해서 표현된다. 앞서 언급한 생일잔치의 재미있는 점은 영화 내내 제시되던 "계층(여기선 계급과 계층을 혼용할 수 있는 용어로 취급하기로 한다)"의 문제로 돌아가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사실 이 이야기는 시예스의 제3계급 논의에서 끌어오려고 했는데... 학부 수업 당시 제3계급 논의에서 제1, 2계급 그러니까 성직자/귀족 계급은 문화적으로 같은 국가에 속한 제3계급보다는 타 국가의 지배계층과 더 유대감을 가진다는 것을 읽었던 것 같은데, 참조하려고 찾아보니 그런 언급이 있는 텍스트는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일단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그것이니 ㅠㅠ 이에 기반해서 논지를 전개하겠다ㅠㅠ).
영화의 주인공이라 할 반지하방 거주 일가족 네 명은, 경제적으로 궁핍하기는 하나 지극히 평범한 한국의 핵가족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들은 경제적으로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기는 하지만, 한국의 대중적인 생활양식을 벗어나지 않는다. 가령, 가족이 함께 외식을 한다던지 할 때 그들의 선택지는 뷔페식 기사식당의 쌈과 고기반찬이다. 그 외 피자를 먹는 씬도 있지만 이 역시 흔히 발견되는 동네 식당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딱 한 번 이질적인 것이 있다면 그건 PPL임이 분명한 캔맥주의 등장이었는데, 아주 뜬금없었고 화면과도 잘 녹아들어 가지 않았기 때문에 그 씬은 봉준호 감독이 반쯤은 셀프 패러디로 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이렇게 그들은 우리가 흔하게 소비하는 좀 못살지만 평범한 한국 가정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와 대비되는 것은 성공한 기업가로서 재력가인 집주인 가족이다. 이들의 언어습관 중에 외국어를 섞어 쓰는 묘사는 우연한 것이 아니다. 반지하집 가족의 아들이 영어 과외 선생으로 들어가면서 외국식 이름인 이른바 '케빈' 선생님으로 불리는 것부터 시작해서, 그것 이상으로 이 재력가 가족의 정서적, 문화적 취향은 한국적인 것을 넘어서 있음이 계속해서 제시된다. 이 재력가 집안은 (그 배경이 충분히 제시되지는 않지만) 주로 유학을 다녀와 해외 문물에 익숙한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한국의 폭발적인 경제성장기에 지극히 한국적인 배경에서 한국적인 방법으로 성장한 경제성장의 1세대들 뒤로, 그 2세대 혹은 보다 늦은 시점에 스스로 성공한 사람들 중에는 해외 문물을 빨리 접한 이들이 많았다. 이들은 이를 통해 취득한 경제/문화/지식자본을 바탕으로 한국사회에서 유리한 지위를 점유하고 (못살았기 때문에 촌스러웠던) 고전적인 한국 전통을 벗어나 보다 세련된 (혹은 세려 되어 보이는) 문화를 형성하며 그 안에서 교류하면서 생활하기 때문에, 이들과 중산층 이하의 한국대중 간에는 꽤 큰 문화격차가 존재한다.
따라서 같은 나라의 같은 문화를 공유하는 사람들이라고 하기 어려운 상태로 이 격차는 벌어지게 된다. 하지만 사실 이 두 계층은 직접적으로 충돌할 일이 많지는 않기 때문에 실생활에서 그 간극을 느끼는 일이란 많지 않다. 하지만 이 불균형의 간극 위에 일상적으로 버티며 서 있는 사람들이 바로 상류계층에 대하여 직접적인 생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가정부, 운전기사 등이다. 이들은 제공하는 노동의 숙련도나, 경제적 지위에 있어서 결코 자신들의 서비스를 독점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그래서 어느 정도는 인간적인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는, 상류계층에 속한 그 집 혹은 차주들과 같아질 수 없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뿐만 아니라 사회문화적으로 서로 이질적인 이들은 매우 일상적인 접촉을 할 수밖에 없다. 결국 이들이야말로 계층의 분화를 가장 예민하게 느낄 지위에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들이 서로 극적으로 부딪히게 만듦으로써 영화는 비로서 성립하였다. 통상 이들간에는 사회경제적으로 힘의 격차가 너무 커서 대립구도가 발생하기 힘든 것이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 갈등구조의 발생을 용케도 거부감 없이 그려냈다.
아래에서는 그 '기생'의 구조를 보자.
4. 사회에서 도태된 이들의 선택
앞서 본 것처럼 재력가에게 '기생'하는 지위에 가정부, 운전사 등이 등장하는 것은 이들이 가장 그 '역착취'를 잘 실현할 수 있는 지위에 있기 때문이었다. (오해하지 말 것은 가정부와 운전기사 등 서비스 제공자들이 서비스를 제공받는 재력가에게 기생한다는 말을 하는 것은 전혀 아니라는 점이다.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자신들이 제공한 노동의 범위 이상으로 역으로 재력가를 착취(exploit)하려는 부분에 있어서 이들은 '기생' 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원래의 가정부 아주머니는 단지 공간을 활용했을 뿐 자신의 남편에게 제공한 먹거리 등은 자신의 월급으로부터 비용을 지출했음을 강변하나 이 역시 집주인 모르게 공간활용 및 자신의 이익 취득이라는 점에서는 합의한 노동의 대가 이상의 것을 가져갔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를 전체 가족 단위로 확장해서 구조적으로 고착화 하고자 한 것이 반지하방 가족의 선택이자 계획이었다 )
하나 재미있는 것은 그 지하방에 숨어있던 아저씨나, 반지하방 가족네 아저씨나 둘 다 대만 왕 카스테라 사업을 하다 망했다는 설정이 제시된다는 것이다. 대만카스테라는 개개의 점주의 잘못 보다는 프랜차이즈 자체의 이미지 실추 및 위기관리 실패에 따라 사업이 망한 대표적인 케이스다. 그러나 각 점주들은 그에 따른 자본상실의 피해를 흡수할 만큼의 경제력이 없었다. 다들 빚을 내서 시작한 가게였던 것이다. 그런데 충분한 교육을 받고 자본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들은 유행에 따른 이런 프랜차이즈 개업을 아마도 하지 않았을 선택일 것이다. 예상치 못한 위험이 개입뒨 결과이기는 하나, 그들은 유행에 따라 단기적으로 돈 벌 수 있다는 현혹에 취약했다. 결국 자본이나 지식 뿐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변화하는 흐름에서 뒤쳐진 사회의 구성원은 정보에 대한 접근 및 판단능력이 떨어졌고, 그에 따른 잘못된 선택이 손해로 이어졌을 때 그 실패를 만회하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시장은 이러한 개개인의 잘못된 경제적 판단에 대하여 냉혹하다. 이러한 냉혹함이 개개인의 판단에 신중을 기울이게 하고, 그것이 전체적인 경제의 효율의 증대로 이어진다는 것이 아마 가장 기초적인 자본주의 경제의 기반일텐데, 그 전제는 시장에서 실패할 시도들은 빨리 실패하게 하고, 그에 투자되었을 노력이 보다 생산적인 다른 방향으로 유도되도록 한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반지하방 가족은 그와는 조금 다른 선택을 한다. 이들은 통신요금 조차 낼 여력이 없을 정도로 궁지에 몰린 상태에서 뜻밖의 기회를 제공받는데, 첫째 아들이 재력가의 집에 영어과외 선생으로 (사기를 쳐서) 취직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파악한 그 집의 취약점을 활용하여 동생은 미술선생님으로, 아버지는 기사로, 어머니는 가정부로 모두 (기망을 통해) 취업시킨다. 재력가 가족의 자본을 안정적으로 자신들의 가족에게 이전시킬 구조를 설계한 것이다. 즉 이들은 생산하는 경제 주체에서 도태된 이후에, 성공한 경제주체에게 안정적으로 '기생'하는 구조를 창출해낸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기생하는 구조의 고착화를 목표로 했던 두 가족(반지하방 4인 가족과 벙커 거주 2인 가족)이 서로의 존재를 인지하게 됨으로써 이들의 안정적인 기생의 역사는 끝을 맞는다. 서로가 서로의 기생을 용인했더라면 이들은 반영구적인 역착취를 성공적으로 끌고 갔을 수도 있을 것이였건만 이 타협에 이르지 못하였고, 그 결과는 꽤나 끔찍했다. (다만, 봉준호는 이러한 비현실적인 이야기와 결말에 있어서도 내부논리에 의한 전개에 있어서는 현실성을 추구하는데 결국 벌어지고 만 살육에 있어서도 그 피해의 규모와 결과는 결코 비현실적이지 않았다. 극단적인 행동의 동기들도 하나하나 이해못할 부분이 없다. 이건 정말 놀라운 재능 혹은 아주 엄격한 현실인식이라고 생각한다.)
5. 맺음말
결코 섞일 수 없는 것들이 융화하는 척 가장하고 있던, 그러나 서로 엇갈리는 이해만을 가지고, 아무 공감도 유대도 없던 빈 관계들은 서로 찌르거나 찔리면서 비극적으로 끝을 맺게되었다. 그리고 이토록이나 어설픈 기반하에 간신히 지탱되고 있는 우리의 관계라는 것을 서로 같은 사회를 살아가는 '공동체'라 부를 수 있는지에 대한 회의감. 이렇게 속시원한 대답을 할 수 없는, 굳이 가리려고 한 것도 아닌데 노출되면 불편한 사회적 지점들을 포착해서 극적인 방식으로 표현해 주는 것은 봉준호의 뛰어난 재능이다. 이로부터 어떤 실천적 함의를 찾는 것은 그것대로 촌스럽긴 한데, 매일을 살아가야 하는 나로써는 그저 가슴 한켠의 어정쩡한 이 불편함을 가지고 이야기의 마무리를 봐야 한다는 것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그래서 조금 궁금하다 봉준호가 느끼는 이 사회에 대한 감정은 어떤 것인지. 그 역시 이 사회를 긍정하기도 하는 것인지.
p.s.
아무튼 이 영화는 온갖 '상징'으로 가득한데, 봉준호는 관객들을 놀리듯 서사와 무관한 상징들도 뿌리거나 회수하면서 유희하듯이 이를 다루고 있다. 영화를 한 번 보고 쓰는 감상평이라 놓치거나 오해한 부분도 많을 것 같은데 ... 그래도 머리 속에 아직 이야기가 남아있고, 다른 리뷰를 보아서 내 생각으로 정리할 수 없게되기 전에 글을 쓰고 싶어서 남긴다.
간만에 글쓰고 싶어지게 만드는 영화였다.
이번 학기 시험이 모두 마무리되면 한 번 정도 더 극장에서 볼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