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가능성과 너의 가능성을 여는 말
어쩌면 이 세상에서 스스로에게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하고 본질적인 말일지도 모른다. 이 말은 단순한 자기 암시가 아니다. 우리 뇌는 이 말을 들을 때 실제로 반응한다. 신경과학에 따르면 긍정적인 자기 대화는 전두엽을 활성화시키고, 판단력과 행동 조절, 동기부여를 높여준다. 즉, “난 할 수 있어”는 단순한 외침이 아니라 뇌의 방향을 설정하는 ‘시동 버튼’과 같은 것이다.
물론 모든 일이 항상 쉬운 건 아니다. 하지만 ‘어렵다’는 감정 자체도 결국은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감각일 뿐이다. 신발을 신고, 책장을 넘기고, 말을 하는 일조차 우리가 어린아이였을 때는 모두 ‘큰일’이었다.
그러나 반복하고, 익숙해지고, 해내면서 이제는 믿음조차 필요 없는 ‘당연한 일’이 되었다. 이처럼 지금 내가 ‘버겁게 느끼는 일’도, 결국은 익숙해지면 그냥 하는 일이 된다.
‘큰일’과 ‘작은 일’의 경계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우주의 시선에서 보면, 그 모든 일은 하나의 작은 먼지에 불과하다. 너무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도 없다. 내게는 인생을 뒤흔드는 사건처럼 느껴지더라도, 시간이 지나고 관점을 달리하면 그것조차도 지나가는 작은 흔적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가끔 스스로에게 말해줘야 한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중요한 건 지금, 내가 해보는 것이다. 믿음을 만들려고 애쓰기보다, 그냥 한 걸음 내딛는 것 자체가 믿음이 된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스스로를 믿지 못하게 만드는 말들이 외부에서 날아올 때다.
“넌 원래 그런 스타일이잖아. 사람 안 바뀌어.”
“이 정도도 못 해? 그럴 줄 알았어.”
“괜히 시작했다가 또 포기하는 거 아냐?”
이런 말들은 가족, 친구, 상사, 심지어는 나를 아끼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기도 한다. 그 말들은 ‘사회적 평가 위협’이 되어 우리의 자유를 옥죈다. 마치 만화 [주술회전]에서 나오는 이누마키 토게의 ‘주언주박(呪言呪縛)’술처럼, 말로써 사람을 공격한다.
사람은 타인의 말에 쉽게 영향받는 존재다. 특히 관계가 가깝거나 권위가 있는 사람의 말일수록, 그 말은 ‘사실’처럼 뇌에 각인되며 우리의 가능성을 스스로 제한하는 틀이 된다. 우리는 이 말의 속박에서 벗어나야 한다.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하자.
“나는 그런 말로 정의되지 않아. 난 할 수 있어. 그리고 해낼 거야.”
이 말은 나를 다시 움직이게 하고, 뇌를 ‘위축’에서 ‘확장’으로 바꾸는 전환점이 된다.
좋은 건 나눠야 한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는 타인에게도 해방의 말을 건네야 한다. “넌 왜 이것밖에 못 해?”라는 말 대신,
“지금은 조금 서툴 수 있지만, 계속하면 분명히 더 잘할 수 있어.”
“넌 매번 쉽게 포기 안 하잖아. 그게 너의 강점이야.”
“이번 도전 자체가 이미 대단한 거야. 결과보다 그 용기가 멋져.”
말을 해보자. 이런 칭찬과 격려는 상대가 스스로 걸어둔 제한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된다. ‘칭찬’은 단지 듣기 좋은 말이 아니다. 칭찬은 타인의 속박을 풀어주는 ‘심리적 해방 선언’이다. 그 말을 들은 상대는 뇌에서 도파민과 세로토닌 같은 긍정적 신경물질을 분비하며 자신을 다시 믿고,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얻는 시작점이 된다.
미국의 시인 마야 안젤루는 이렇게 말했다. “한 사람의 존재 자체가 또 다른 한 사람의 삶 전체를 바꿀 수 있다.” 그 ‘가치 있는 존재’ 임을 느끼게 해주는 말이 바로 위와 같은 칭찬이다.
결국, 인생은 두 가지 선택의 반복이다. 나에게 어떤 말을 할 것인가. 타인에게 어떤 말을 건넬 것인가. 지금 내가 하는 이 일이 크든 작든, 우주의 관점에선 모두 점과 같은 일이다. 그 점에 너무 짓눌리지 말자. 익숙해지면 작아지고, 믿고 해 보면 가능해진다. 기억하자. 말은 속박이 될 수도, 해방이 될 수도 있다.
스스로에게는 “난 할 수 있어”라는 말로 힘을 주고, 타인에게는 “넌 충분해”라는 말로 그들의 속박을 풀어주자. 그것이 진짜 ‘사람을 살리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