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해 줘서 고마워!”
고등학교 마지막 겨울 방학 어느 날, C에게 연락을 하여 모교 중학교 교정에서 만났다. 교정엔 잔설이 남아 있었다. 살짝 서먹한 기운을 누그러뜨리려는 듯 C가 먼저 입을 열었다.
C와 이야기를 해본 것은 초등학교 때뿐이었다. 같은 중학교를 다녔어도 말을 나눠본 적이 없었다. 고등학교는 각자 외지로 나가 더더욱 말을 할 수 없었다. 외지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C는 집안 사정 때문에 고향의 고등학교로 전학을 왔다. 소문을 들었지만 본 적은 없었다. 이런 C에게 내가 연락을 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C가 내게 호감을 갖고 있다는 약점 때문이었다. C는 초등학교 졸업 무렵 내게 편지를 보낸 적이 있고 중학교 때도 말을 나누진 않았지만 내게 호감을 갖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외지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 한 버스를 탄 적이 몇 번 있었는데 여전히 내게 호감을 갖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C에게 연락을 취한 건 그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한 집에서 하숙하던 고등학교 후배가 선배는 여자 친구도 없냐는 말에 나도 있다며 보여주겠다고 호언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날 C와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후 C와 나는 서너 번 더 만났다. 만나는 중에 나는 C에게 가와바다 야쓰나리의 『설국』을 선물했다. 특별한 의미를 둔 것은 아니었다. C가 문학을 좋아했기에 그저 내가 갖고 있던 소설 책중 하나를 준 것뿐이었다.
그해 나는 대학 입시에 실패했고, C는 모 대학 국문과에 진학했다. 나는 괜한 자존심에 더 이상 연락을 하지 않았다. 이듬해 나는 사범대학에 진학했다. 어느 날 과(科) 편지꽂이에 C가 보낸 학보가 와 있었다. C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지만, 나는 답을 하지 않았다.
“남편에게도 네 얘기했어!”
직장 생활중 여름방학을 맞아 집에 있던 어느 날 C가 찾아왔다. 낯익은 얼굴들과 함께였다. 초등학교 때 활동했던 자유교양부 동창들과 계속 만나고 있는데 이번에 고향에서 모임을 갖게 됐고 우연히 내 안부가 궁금해 왔다는 것이었다. 자유교양부에 남자 둘이 있었는데 그중의 한 명이 나였다. 오랫만이라 허공에 떠도는 먼지 같은 잡담을 나누던 중 C가 약간은 엉뚱한 고백을 했다(C는 소문에 듣자니 대학 때 임신을 했고 졸업과 동시에 결혼을 했다고 했다. 상대는 같은 과 선배였다고 들었다). C의 엉뚱한 고백에 나는 약간 머쓱했다. 이후 C와는 연락이 두절되었다.
“ㅇㅇ CEO가 네 동창이라던데!”
일요일, 오랫동안 연락을 하지 않았던 대학 동창 내외가 찾아왔다. 둘은 과 커플이었다. 3년 전에 명퇴를 했는데 불현듯 생각이 나서 왔다고 했다. 반가운 정담을 나누고 헤어질 무렵 남자 동창이 뜬금없이 말했다. “그래...?” 심드렁하게 대답을 했다.
그런데 집히는 것이 있었다. ‘혹시 C?’ 여자 대학 동창은 묘하게도 초등학교 때 자유교양부를 함께 했던 한 여자애와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그것도 친한. 그 여자애가 자기 동창들― 특히나 친한 자유교양부 친구들 ―이야기를 여자 대학 동창에게 했을 가능성이 있고 그런 중에 C가 내게 호감을 갖고 있던 사실도 말했을 수 있다. 이런 이야기를 남자 대학 동창도 알고 있을 수 있으니…. 그랬기에 남자 대학 동창이 내게 말을 꺼낸 것이 아니었을까 싶었던 것이다.
동창 내외를 보내고 심심파적으로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예측대로 C였다. 개명을 하여 옛날에 사용하던 애칭을 본명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성공한 사업가인 데다 소설과 같은 간난(艱難)한 삶을 살아 인터뷰를 한 것도 많고 드라마도 있었다. 약간 놀란 것은 독실한 기독교인이 돼있다는 것이었다. 많은 인터뷰에서 간난한 삶을 신앙으로 극복했다고 말했다. 부와 명예라는 사회적 기준으로 보면 C는 초·중학교 동기동창 중 가장 성공한 동기동창이 아닐까 싶었다.
C의 인터뷰를 보면서 놀란 것은 CEO임에도 불구하고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다는 거였다. 말과 얼굴 모두에 진솔함이 묻어났다.
돌아보면 C는 참 괜찮은 동창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 나는 C를 가까이하지 않았다. 만일 내가 조금만 노력했다면 C는 지금 내 곁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평범한 아낙네로.
오늘은 눈이 간헐적으로 내린다고 한다. 문득 C와 만났던 잔설이 남아 있던 교정이 생각난다. 그 교정은 지금 남아 있지 않다. 폐교가 된 것. 앞으로 C를 만날 일이 있을까? 없을 것 같다. 그러나 만난다면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고 싶다. “너를 키운 건 팔 할이 나야~” 그래도 C는 왠지 해맑게 웃어줄 것 같다.
*자유교양부: 70년대 고전 읽기 교육 일환으로 만든 일종의 독서반이다. 특정 학생들을 모아 지정 고전을 읽게 하고 이들을 대상으로 교내외에서 시험을 치르고 시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