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 선생 유묵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 어느 민족도 일찍이 그러한 일을 한 이가 없으니 그것은 공상이라고 하지 마라. 일찍이 아무도 한 자가 없기에 우리가 하자는 것이다.”
김구 선생의 「나의 소원」이란 글의 일절이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투사(鬪士)로 살았던 분이 민족의 사업으로 힘주어 말한 것이 강성대국(强盛大國)이 아니라 사랑과 평화의 문화국이었다는 것이 놀랍다. 거대한 땅과 폭력을 추구하는 야만의 독재 시대를 청산하고 작은 땅과 문화라는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는 협력과 공존의 시대를 지향했던 선생에게선 정치가적 면모보다는 지사로서의 면모가 더 두드러져 보인다.
정치인들 중에 그를 좋아하면서도 정치가로서는 후한 점수를 매기지 않는 이들이 있는데 이런 선생의 면모가 큰 요인이라고 한다. 복마전 같았던 해방정국을 해쳐 나가기 위해서는 여우의 지혜도 필요했는데 선생은 우직한 곰과 같은 면모만 보였다는 것.
그러나 그런 우직한 면모를 가졌던 분이었기에 세월이 흐를수록 그분의 가치가 더 빛나는 것 같다. 당시 노회 한 술수로 정국을 헤쳐 갔던 많은 이들 – 대표적인 인물이 김일성과 이승만이다 – 이 역사의 매서운 평가에 부침(浮沈)하는 것을 보면 이를 실감할 수 있다. 물론 김구 선생에 대한 평가도 긍정 일색인 것은 아니지만 당시의 여러 인물에 비교해보면 긍정 우위를 점하는 건 확실하다.
사진은 김구 선생이 환국하기 전날 저녁에 쓰신 휘호이다. 「불변응만변 을유추반국전석 백범 김구(不變應萬變 乙酉秋返國前夕 白凡 金九)」라고 읽는다. “변하지 않는 것으로 온갖 변화에 대응하자 / 을유년(1945) 가을 고국으로 돌아가긴 전날 저녁 백범 김구 쓰다”라고 풀이한다. 해방된 고국으로 돌아가는 노 독립투사의 만감(萬感)이 서린 휘호이다. 자력으로 해방을 맞이하지 못하고 온갖 이념과 노선으로 갈가리 나뉜 고국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여기 ‘불변’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바로 ‘민족’이다. ‘만변’ 역시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바로 혼란한 ‘해방 정국’을 가리킨다. 이 휘호에서도 선생의 우직한 면모가 느껴진다.
당시 많은 이들이 선생과 마찬가지로 ‘민족’을 부르짖었지만 이면에는 ‘자신(自身)’과 ‘자당(自黨)’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강했다. 이는 선생 역시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자신과 임정(臨政)이 중심에 놓여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강도, 즉 자신과 자당이 민족보다 우선시 돼야 한다는 마음은 다른 이들에 비해 훨씬 더 약했다는 생각이 든다. 협상이 결렬될 것이 분명해 보이는데도 북의 김일성을 만나러 간 것이 그 한 증좌(證佐)이다. 확실히 선생은 정치가적 면모보다는 지사로서의 면모가 강했다. 사진의 글씨도 그런 면모를 보여준다. 다소 거칠지만 결기에 찬 아우라를 발산하는 글씨이다.
變과 應 두자만 자세히 살펴보자.
變은 강제적 수단을 사용하여 변화시키다란 의미이다. 攵(칠 복)을 사용하여 의미를 표현했다. 나머지는 음을 담당한다. 변할 변. 變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急變(급변), 變貌(변모) 등을 들 수 있겠다.
應은 心(마음 심)과 雁(기러기 안)의 합자이다. 뜻이 모아진다는 의미이다. 心으로 의미를 표현했다. 雁은 음(안→응)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한다. 흐트러짐 없이 무리 지어 나르는 기러기처럼 뜻이 모아졌다는 의미로 본뜻을 보충한다. 합할(응할) 응. 應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應接(응접), 相應(상응) 등을 들 수 있겠다.
사진은 JTBC의 「차이나는 클라스」에서 김병기 교수가 한 강의 중에 등장한 것이다. 이 휘호는 현재 상해 임시정부 청사 건물에 있다고 한다. 김 교수는 많은 이들이 한자 한문에 무관심하다 보니 선열들이 남겨놓은 유묵을 그저 “아무개 글씨래” 정도로만 여기고 그 의미나 가치를 알아보려 하지 않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다며 그 한 사례로 이 휘호를 들었다. 출연자 중 한 사람도 상해 임시정부 청사에 갔었는데 이 글씨를 봤던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며 자책을 했다. 한자 한문을 몰라 선조의 유산들을 청맹과니(눈뜬 장님)처럼 대해야 한다는 건, 정말 슬픈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