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자극

서거정의 「침산만조(砧山晩照)」시비

by 찔레꽃
pimg_7232191432382674.png


그대 보지 못하였는가 강동의 장한(張翰) 생애를 / 가을바람에 홀연 고향 그리워 강동으로 돌아갔지 / 생전의 한잔 술이 좋지 / 천년 뒤의 명예가 무슨 소용인가


이백의 「행로난(行路難)」일부분이다. 가을바람이 불자 홀연 고향의 순채국과 농어회 생각이 나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한 장한의 결행을 찬미하고 있다. 장한은 왜 힘들게 들어섰을 벼슬길을 헌신처럼 내버리고 귀향했을까? 고향에서 먹던 순채국과 농어회가, 벼슬을 그만 둘 정도로, 정말 그토록 간절했던 걸까? 그랬을 수도 있지만, 그건 그저 장한의 마음을 건드린 자극(핑계)에 불과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미 그의 마음속엔 귀향의 결심이 무르익은 상태였을 것이다. 우발적으로 보이는 일도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결코 우발적이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지 않던가. 내막을 모르기에 우발적으로 보이는 것뿐.


사진은 대구 침산 공원에 있는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의 「침산만조(砧山晩照)」시비이다. 예전에 인터넷에서 얻은 것인데 출처를 잊었다. 사진 찍은 분께 양해를 구한다.


水自西流山盡頭 수자서류산진두 물은 서쪽에서 흘러와 산머리에 이르고

砧巒蒼翠屬淸秋 침만창취속청추 침산 푸른 숲에는 가을빛이 어리었네

晩風何處舂聲急 만풍하처용성급 해 질 녘 바람에 묻어오는 촉급한 방아 소리

一任斜陽搗客愁 일임사양도객수 석양의 객수를 아프게 두드리네


나그네 설움을 토로하고 있다. 멋진 풍경과 대조를 이루니 나그네 설움이 더더욱 핍진하다. 재미있는 것은 나그네 설움을 돋우는 자극이 '방아 소리'라는 것. 이 방아 소리는 저 장한의 순채국과 농어회 같은 자극 요소가 아닐까 싶다. 고향에 돌아가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새삼스레 자극하기에 애처롭게 들리는 걸 것이다. 시인에게 방아 소리는 단순한 방아 소리가 아닌 남다른 느낌을 전하는 그 무언가 일 것. 그렇기에 남다르게 그의 고단한 객수를 자극하는 것이다.


남다른 느낌을 주는 방아 소리의 정체는 무엇일까? 어릴 적의 추억일 수도 있겠고, 집안의 그리운 풍경일 수도 있겠고, 다소 저급하지만 아내와의 방사(房事)― 방아는 흔히 남녀의 교합을 은유 ―일수도 있을 것이다. 여하간 그에게 방아 소리는 남다른 그 무엇이고 그 남다른 소리로 인하여 자신의 나그네 처지가 새삼스럽게 인식됐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귀향 결의로 이어지지 않았을까 싶다.


본래 이 시는 「달성십경(達城十景)」이라는 서거정의 연작시 중 한 수이다. 몇 경 몇 경을 읊는 연작시는 대개 그 풍경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는데 중점을 둔다. 그런데 이 시는 풍경의 아름다움보다 객수의 고단함을 일깨우는 것이 주가 돼서 후한 점수를 주기 어렵다.


낯선 한자를 몇 자 자세히 살펴보자.


砧은 石(돌 석)과 占(점칠 점)의 합자이다. 다듬잇돌이란 의미이다. 石으로 뜻을 표현했다. 占을 음을 담당한다. 다듬잇돌 침. 砧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砧石(침석, 다듬잇돌), 砧杵(침저, 다듬잇 방망이) 등을 들 수 있겠다.


巒은 작은 봉우리가 연이어 있는 산이란 의미이다. 山(뫼 산)으로 뜻을 표현했다. 나머지 부분은 음을 담당한다. 뫼 만. 巒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巒峰(만봉, 산봉우리), 巒岡(만강, 언덕 혹은 작은 산) 등을 들 수 있겠다.


舂은 拱(두 손 맞잡을 공)의 옛 글자와 臼(절구 구)의 합자이다. 두 손으로 절구 공이를 들고 절구통에 임한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곡식을 찧는다는 의미이다. 찧을 용. 舂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舂碓(용대, 절구통), 舂炊(용취, 절구질과 밥 짓는 일) 등을 들 수 있겠다.


搗는 扌(手의 변형, 손 수)와 島(섬 도)의 합자이다. 공이를 들고 찧거나 두드린다는 의미이다. 扌로 뜻을, 島로 음을 표현했다. 찧을(두드릴) 도. 擣와 통용한다. 搗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搗衣(도의, 다듬이질을 함), 搗精(도정, 현미를 찧거나 쓿어서 등겨를 내어 희고 깨끗하게 만듦) 등을 들 수 있겠다.


愁 는 秋(가을 추)와 心(마음 심)의 합자이다. 우울한 마음이란 의미이다. 心으로 뜻을 표현했다. 秋는 음(추→수)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한다. 가을이 되면 만물이 쇠락하여 풍경을 접할 때마다 우울한 마음이 든다는 의미로 본뜻을 보충한다. 근심 수. 愁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愁心(수심), 憂愁(우수) 등을 들 수 있겠다.


위에서 이 시를 혹평했다. 그러나 이 시를 침산의 수려한 풍광과 특히 이곳에서 맞이하는 저녁 풍경이 운치 있다는 것을 드러낸 것으로 본다면 그 나름대로 성공한 시라고 평가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서거정의 본관은 '달성'이다. 자신의 뿌리 풍경을 읊는 소회는 그렇지 않은 사람이 읊는 소회와 분명 다를 것이다. 위 시를 포함한 '달성십경'시는 서거정이 자신의 본향에 바친 흠모의 헌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대구가 코로나19로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 명계(冥界)에서 그가 현상황을 본다면 심히 마음이 아플 것 같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옥에 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