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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의거일에 부쳐

by 찔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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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스타일의 남자를 좋아하세요?"

"남자는 그저 처자식 안 굶기고 밤일만 잘하면..."


윤봉길 의사의 부인 '배용순' 여사 묘소 안내판을 보면서 불경스럽게 영화 '수상한 그녀'의 대사 한 대목이 떠올랐어요. 노년의 오말순(나문희 분)은 청춘을 돌려주는 사진관에서 젊은 오두리(심은경 분)로 변한 뒤 뜻하지 않은 여러 경험을 하게 되는데, 그중의 하나가 젊은 PD 한승우(이진욱 분)와의 연애죠. 한승우는 젊은 외모에 비해 성숙한 말과 행동을 하는 오두리에게서 모성애를 느껴요. 그러던 어느 날 오두리에게 본격적으로 구애하기 위해 위 질문을 던졌다가 너무도 뜻밖의 대답을 듣고 순간 공황 상태에 빠지죠. 그러다 이내 폭소를 터뜨려요. 걸쭉한 농담으로 받아들인 거죠. 그러나 오두리의 대답은 농담이 아닌 그녀의 삶에서 체득한 진실한 대답이었어요.


배용순. 열여섯 살에 한 살 어린 신랑 윤봉길에게 시집와 7년간 같이 살면서 2남 1녀를 두었고 10년 뒤인 스물여섯 살에 남편을 잃었으며 시부모와 많은 시동생을 거느린 맏며느리로 살다, 여든둘에 생을 마감한 여인. 이 여인에게 남자, 남편이란 어떤 존재일까를 생각할 때, 저 오두리의 대답이 가장 적확한 답이 아닐까 싶더군요.


그래서 그랬을까요? 배용순 여사는 자신을 의사의 아내로 여기의 주변의 시선에 부담을 느꼈어요.


"덕산면 우리 집에는 봄과 가을이면 소풍 온 학생들이 마당 가득히 들어서서 '윤봉길 의사'를 기렸다. 나는 학생들이 들이닥칠 때마다 어디론가 숨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내가 내 남편의 '장엄한 죽음'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며, 자랑으로 여길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남편의 동상이 효창공원에 세워질 때에도 그 자리에 나가기를 꺼려했고 그 밖에도 남편과 관계된 자리에는 되도록 나서려고 하지 않았다. 한 불행한 아낙네의 삶에 씌워지는 가당찮은 비단옷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조국을 위해 산화한 의사의 아내가 한 말이라기엔 너무도 초라해 보이죠. 그러나 진솔한 고백이란 생각이 들어요. 그녀가 원한 것은 저 오두리가 말한 그런 남편과 행복하게 사는 것이었지 지사의 아내라는 화려한 호칭이 아니었기 때문이죠. 그것은 남편 잃은 그녀에게 가해진 또 하나의 고초였던 셈이에요.


그러나 저는 그녀의 고백이 되려 의사의 아내답다는 생각이 들어요. 거짓으로 남의 기대에 부응하기보다는 진솔하게 자기 마음을 표현했기 때문이죠. 경우가 약간 다를 수 있지만 한 친일파의 후손이 내뱉은 다음 궤변과 비교해 보면 그 진솔함을 더 빛을 발해요.


"우리 할아버지가 친일파라면 일제 강점기 중산층은 다 친일파다(이인호 KBS 이사장)."


배용순 여사는 돌아가서도 남편과 같이 있지 못해요. 배용순 여사의 묘소는 덕산 충의사에 있고, 윤봉길 의사의 묘소는 서울 효창공원에 있거든요. 한평생을 힘들게 보낸 여인에게 너무 가혹한 처사가 아닌가 싶어요.




*오늘은 윤봉길 의사의 상해 홍커우 공원 의거가 있었던 날이다. 의사에 대한 추모야 당연한 거지만 그가 남긴 식솔[아내]의 삶도 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나 싶어 예전에 썼던 글을 다시 꺼내 보았다. 아름다운 삶 뒤에 남겨진 신산한 고통은 많은 이들을 가슴 아프게 한다. 의사를 추모할 때는 그의 식솔[아내]도 꼭 함께 추모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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