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이 새끼들, 왜 이렇게 꾸물대는지 모르겠어! 씨팔.”
어제 금융 기관에 갔다. 번호표를 뽑고 자리에 앉았는데, 옆자리 중년 사내가 전화에 대고 씨부렸다. 많이 기다려 짜증이 났나 보다 생각했다. 그래도 그렇지, 욕까지…. 그런데 가만히 보니 이 사내, 욕할 만도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 처리 직원이 꽤 여럿인데, “띵똥, ㅇ번 손님 ㅇ번 창구로 오십시오”라는 멘트가 가뭄에 콩 나듯 들렸던 것. 바쁘게 띵똥 소리가 들리는 금융 기관의 일반적인 모습과 다르니 갑갑증이 나 욕할 법도 하겠다 싶었다. 순간, 내 앞에 ‘15명 대기 중’이라는 티브이 화면이 눈에 띄었다. 오호라, 나도 시험대에 들겠구나!
현대 문명의 모토는 효율과 속도이다. 그중에서도 속도. 제아무리 효율이 좋아도 속도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무의미하다. 낙오되거나 도태되기 때문. 문명의 첨단을 걷는 기업들이 속도에 목숨 거는 것은 이 때문 아니겠는가. 이런 문명 속에 사는 개인에게 ‘인내와 여유’를 말한다면 필시 ‘잠꼬대’로 취급될 것이다. 그런데 ‘잠꼬대’를 하고 싶다. 왜? ‘인내와 여유’가 기쁨이나 행복감과 관련 깊기 때문이다.
비근한 경험 하나. 글쓰기가 취미인데, 언제부턴가 인공지능에 기대어 글을 쓰게 되었다. 글이 빠르고 쉽게 써졌다. 게다가 허점도 없고 깔끔했다. 전에는 글 한 편 쓰려면 적어도 반나절은 걸려야 했는데, 인공지능에 기대어 글을 쓰니 길어야 두 시간을 넘기지 않았다. 얼마나 속도감 있고 효율적인가! 그러면 매우 기뻐야 할 텐데, 이상하게 마음이 허전했다. 인공지능의 도움 없이 글을 쓸 때는 힘들고 결과도 좋지 않은 때가 많았지만, 그래도 글을 쓰고 나면 뭔가 충만감이 밀려왔는데 그런 것을 느낄 수 없었다. 생각해보니, 글을 쓰는 동안 갖게 되는 자기 정화의 과정이 생략되거나 짧아서 그런 것 아닌가 싶었다. 이것은 인공지능이 채워줄 수 없고 나 스스로 채울 수밖에 없는 영역이다. 이후 인공지능의 도움 받는 글쓰기를 중단했다. 제아무리 글이 빠르게 잘 써진들 기쁨을 주지 못하는데, 그런 글을 써서 뭐 하나 싶었던 것이다.
효율과 속도는 자본주의와 관계가 깊다.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해 등장한 것이 효율과 속도 아니겠는가.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표면적으로 보면 효율과 속도가 돈을 많이 벌어다 줄 것 같지만, 진짜 큰돈을 벌려면 ‘인내와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크게 성공하는 기업들을 보면 앞을 내다보고 투자하면서 ‘인내와 여유’의 시간을 가진다. 투자자들도 비슷하다. 워런 버핏의 유명한 말을 들어보라. “주식 성공이란 인내하지 못하는 자의 돈을 인내하는 자가 가져가는 것이다.” 세속적인 성공의 논리에서조차 ‘인내와 여유’가 핵심이라면, 우리 내면의 깊은 기쁨을 얻는 과정은 그보다 더 ‘인내와 여유’가 필요하지 않을런지?
효율과 속도의 문명 속에 사는 이에게 ‘인내와 여유’를 말하는 것이 한낱 ‘잠꼬대’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단견이지 싶다. 즉물적 만족에서 오는 기쁨(행복)은 흡사 소금물을 들이키는거와 같아, 당장은 만족스럽지만 점점 더 갈증을 느끼게되어 사람을 조급하게 만든다. 속깊은 기쁨(행복)을 느끼기 어렵게 만드는 것. 빠를수록 좀 더 '인내와 여유'를 가져야 속깊은 기쁨(행복)을 맛볼 수 있다, 고 감히 말하고 싶다. 새삼스런 말이지만, 우리는 기계가 아니고 감정을 가진 인간이기 때문에 더더욱! (기다리기 힘들어 욕설을 했던 중년 사내도 처음부터 그러지는 않았을 터이다. 효율과 속도에 익숙해져 자신도 모르게 조급증을 갖게 됐기에 그리했을 것이다. 더불어 욕설을 내뱉으며 일시적으론 쾌감을 느꼈을지 모르겠으나 뒷맛은 개운치 않았을 게다. 조금 더 참고 기다렸으면 어땠을까?)
이쯤 되면 번호표를 들고 ‘15명 대기 중’이란 문구를 보며 시험대에 올랐던 귀하는 결국 어떻게 행동하셨나, 궁금해하실 것 같다. 하하, 티브이 옆에 놓인 꽃병의 꽃이 참 아름답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