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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고향으로 족하다

by 찔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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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바빙, 오래전 공주에서 본 레스토랑 이름이다. 이 레스토랑 이름이 잊혀지지 않는 건 전혜린의 수필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에 등장한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다시 나의 전설 슈바빙」에서 자유로우면서도 개성 넘치는 슈바빙을 향수병을 앓는 이처럼 그리워한다(슈바빙은 그녀가 독일 유학시절 머물던 소도시 이름이다). 그녀의 글을 통해 슈바빙은 일면식도 없는 내게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 되었다. 슈바빙 간판을 대했을 때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사진의 한자는 '완화계(浣花溪)'라고 읽는다. '꽃을 빠는 시내'란 뜻으로, 맑은 물에 비친 꽃을 마치 강물이 꽃을 씻어주는 듯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완화계는 두보(杜甫, 712-770), 여류 시인 설도(薛濤, 768-832)와 관계 깊은 시내로 우리 선조들에게 매우 친숙한 장소이다. 두보와 설도는 이곳 주변에 초당을 짓고 문인들과 교류하며 가작(佳作)을 내놓았다. 이곳에서 지어진 작품중 널리 알려진 것에 '객지(客至, 두보 작)'와 '춘망사 사수(春望詞 四首, 설도 작)'가 있다. 사진은 이 가작의 산실인 완화계를 그리워하며 새긴 각자(刻字)이다. 완화계 각자를 새긴 사람이나 보는 이들은 필시 두보나 설도의 작품을 떠올리며 친근함과 정겨움을 느꼈을 것이다.


이제는 각자를 새기거나 마음속으로만 사모하지 않고 손쉽게 완화계를 찾아갈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완화계는 사천성(四川省) 성도(成都)에 있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완화계나 그 주변에 있었다는 두보와 설도의 초당이 옛 모습과 다르다는 사실이다. 세월이 많이 흘렀으니 당연하다고도 할 수 있지만, 문제는 세월이 아니라 왜곡된 복원이란 사실. 예의 중국인의 그 거대주의 때문에 완화계나 초당의 소박한 정취를 느끼기 어렵도록 너무 크게 복원하여 옛시를 공부하는 이들이 완화계를 찾았다가 실망을 금치 못한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완화계를 직접 가볼 수 없었던 옛 분들이 오히려 더 행복했는지도 모르겠다. 직접 가볼 수는 없지만 늘 마음속에 새기고 그리워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찾아가서 실망하는 것보다 이편이 더 낫지 않겠는가.


언젠가 슈바빙을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완화계 복원 소식을 접하고 마음을 접었다. 왠지 슈바빙도 전혜린이 언급하던 그때의 공기를 잃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옛사랑은 다시 만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마음속의 모습과 현실의 모습이 너무 달라 실망이 크기 때문이라는 것. 슈바빙은 그저 마음속의 고향 같은 장소로만 간직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거듭한다.


한자를 자세히 살펴보자.


浣은 氵(水의 변형, 물 수)와 完(완전할 완)의 합자이다. 옷을 빨았다는 의미이다. 氵로 의미를 표현했다. 完은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한다. 옷을 빨아 온전히 깨끗하고 아름답게 만들었다는 의미로 본뜻을 보충한다. 빨 완. 浣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浣雪(완설, 원죄를 씻어 줌), 浣沐(완목, 발을 씻고 머리를 감음) 등을 들 수 있겠다.


花는 흐드러지게 핀 꽃 혹은 꽃가지라는 뜻이다. 艹와 化(될 화)의 합자이다. 艹는 본래 꽃가지가 늘어진 모양을 그린 거였는데, 후에 풀초[艹]의 모양으로 변했다. 化 역시 처음에는 지금과 다른 모양의 글자로 '펴다'라는 뜻으로 사용됐었다. 꽃 화. 花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百花齊放(백화제방, 사상과 주장이 만개한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 花卉(화훼) 등을 들 수 있겠다.


溪는 氵(水의 변형, 물 수)와 奚(어찌 해)의 합자이다. 계곡 사이로 흐르는 물이란 뜻이다. 氵로 뜻을 표현했다. 奚는 음(해→계)을 담당한다. 시내 계. 溪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碧溪水(벽계수), 淸溪(청계) 등을 들 수 있겠다.


설도의 '춘망사' 4수 중 셋째 수가 우리 가곡 '동심초'이다.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만날 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

무어라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안서(岸曙) 김억(金億,1896-?)의 번안인 가곡 동심초는 원시(原詩) 보다 더 애잔한 느낌을 준다. 오래전 번역이지만 읽을 때마다 정말 탁월한 번역이란 생각이 든다. 졸역(拙譯)과 대조하면 더더욱 그렇다.


風花日將老 풍화일장로 바람에 꽃은 날마다 시드는데

佳期猶渺渺 가기유묘묘 아름다운 기약 오히려 아득하네

不結同心人 불결동심인 그대와 한마음 맺지 못하고

空結同心草 공결동심초 헛되이 동심초만 묶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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