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의 회고에서 출발한 한 해

나는 이 두 가지에 꽤 충실한 한 해를 보냈습니다.

by Stephan Seo

밀도 있게 지나간 2025년이었습니다.

회고를 위해 올해의 주요 장면들을 하나씩 늘어놓아 보면, 분명 올해의 일들인데도 꽤 오래전 이야기처럼 느껴집니다. 자주 곱씹지 못해 충분히 조명해주지 못한 순간들에 대한 미안함, 이 모든 일들을 정말 올해 다 해냈다는 사실에서 오는 숨가쁨,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겹쳐지는 묘한 뿌듯함까지. 여러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와 잠시 멈춰 서게 됩니다.


특히 올해는 조급함으로 시작해, 그 조급함을 ‘해소’가 아닌 ‘이겨냄’으로 마무리한 해였습니다. 불필요한 강박에서 한 발짝 물러나, 내 삶에서 진짜 중요한 것들에 조금 더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스스로가 꽤 기특하게 느껴집니다. 그 강박은 커리어 초기에 막연히 그려두었던 ‘10년 뒤의 나’에 대한 기대치였습니다.

만 10년이 도래하는 8월까지 마음이 유독 바빴고, 마침 진행 중이던 리더십 코칭에서도 이 주제가 반복해서 등장했죠. 본질적인 질문들에 하나씩 답해가며, 시나브로 그 강박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었습니다.

조급함이 사라졌다기보다는, 조급함을 다루는 법을 조금은 알게 된 것에 더 가깝습니다.

스크린샷 2025-12-28 오전 11.18.21.png 작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회고를 하고, 바로 다음 날 가볍게 러닝을 시작했다.


작년의 회고에서 출발한 한 해

2025년은 작년 회고에서 적어둔 두 문장에서 출발했습니다.

가족(와이프)과 더 잘 시간 보내기
달리기 꾸준히 하기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이 두 가지에 꽤 충실한 한 해를 보냈습니다.


1. 달리기 — 쉽게 뛰게 된 해

106회 러닝, 누적 475km, 50시간 36분

작년 하반기부터 다시 달리기를 시작하긴 했지만, 그땐 ‘쉽게’ 뛰지 못했습니다. 의무감에 가까운 달리기였고, 마음이 먼저 지쳐 있었죠. 올해는 숫자도 뿌듯하지만, 무엇보다 달리기와 가까워졌다는 감각이 좋습니다.


중랑구에 살면서 처음으로 중랑천을 뛰었을 때, 이 집을 처음 매매했을 때의 설렘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아, 여기 살고 있어서 참 좋다’는 감정이 몸으로 느껴졌죠. 야근이 잦은 날에도, 일정이 빠듯한 날에도 출근 전 이른 시각이나 퇴근 후 늦은 밤 집 앞 용마폭포공원을 가볍게 뛰었습니다.

스크린샷 2025-12-28 오전 11.20.56.png 시나브로 달리기 매력에 빠져들기 시작한 2-3월, 집착하며 뛰기 시작한 8-9월


약속 장소까지 달려서 이동하기도 했고, 퇴근 후 귀가를 러닝으로 대신하기도 했습니다. 페스티벌처럼 느껴졌던 다섯 번의 마라톤 대회, 개인 PB 경신, 연말에는 처음으로 LSD에 도전해 15km를 무탈히 완주하며 하프 마라톤에 대한 심리적 거리도 한층 가까워졌습니다.


몸이 건강해졌고, 그 덕분에 마음도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유나와 함께 뛰는 날들이 많아지면서 ‘가족과 더 잘 시간 보내기’와 ‘달리기’라는 두 목표를 동시에 이뤄냈다는 점입니다.


2. 페스티벌 — 영혼의 에너지를 채운 시간들

올해는 총 세 개의 페스티벌에 참여했습니다. (몸살로 노쇼한 뷰민라는 아쉽게 제외…) 서재페, 피크페, 카스쿨, 매들리메들리. 연애 시절엔 자주 다녔고, 결혼 이후에도 간헐적으로 가긴 했지만 확실히 페스티벌과는 조금 멀어졌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스크린샷 2025-12-28 오전 11.26.53.png 서재페, 피크페

금요일 오후 반차를 내고 간 서재페. 뙤약볕 아래 올림픽공원 잔디에 늘어져 있다가 루시를 보고, 에픽하이 시간에는 목이 쉬도록 뛰어놀았습니다. 피크 페스티벌은 짧고 굵게. 엔플라잉을 보러 갔다가 로맨틱펀치 배인혁의 무대에 제대로 충격을 받고 돌아왔죠. 락페 특유의 에너지가 정말 남달랐습니다. 카스쿨 페스티벌은 끝없는 물세례에 무방비로 흠뻑 젖었던 기억. 아무 준비 없이 갔다가 사당역 지하상가와 유니클로에서 전부 환복하며 깔깔 웃었습니다. 빅나티와 루시의 미친 라이브, 그리고 과천 서울랜드라는 공간이 주는 추억까지 더해져 여러모로 기억에 남습니다. 매들리메들리는 생애 최초로 지드래곤을 본 것만으로도 충분했는데, 뜻밖에 이센스까지 볼 수 있어 더 충만했습니다.

스크린샷 2025-12-28 오전 11.28.00.png 카스쿨, 매들리메들리

매번 다녀오면 몸은 녹초가 됐지만, 영혼의 에너지는 훨씬 더 충전된 느낌. 내년에도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종종 다녀와야겠습니다. 어려운 티켓팅을 꼬박꼬박 성공시켜준 와이프에게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 번 감사를.


3. 여행 — 함께여서 더 선명했던 기억들

여행 13번 (처갓댁과 함께한 가족 여행 4번)

바쁜 와중에도 월 1회 이상 여행을 챙긴 해였습니다. 마라톤을 겸해 다녀온 곳들을 제외하더라도 10번의 여행이 남습니다.


설 연휴, 전주·완주에 폭설이 내려 꼼짝없이 갇혔던 설국의 기억. 물자 조달조차 어려워 겨우 도착한 편의점에서 먹을 것들을 모아오던 장면, 빙판길을 조심조심 빠져나오며 즉흥적으로 전주에서 하루를 더 묵고 가맥을 즐겼던 밤. 영종도의 비 오는 선셋 마라톤과 끝나고 먹은 삼겹살과 소주, 고운이네 부부와 즉흥적으로 떠난 두 번의 강원도 여행, 해변에서 먹은 물회, 만취 상태로 벌어진 귀신의 집 놀이(?)까지, 다시 떠올려도 웃음이 새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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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 아버님과 함께한 춘천 봄내 마라톤 여행, 닭갈비보다 더 기억에 남았던 장어구이. 양양 강변 마라톤의 운영 미숙으로 10km가 9km로 둔갑한 슬픈 사연과 호텔 1층 노랑통닭이 제일 맛있었던 또 다른 슬픈 이야기. 처형네 가족까지 함께한 청와대 투어 후 홍제 여행, 조선 팰리스에서의 디너, “100만 원짜리 위스키!”에 모두 벌떡 일어났던 깔깔 모먼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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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화룡점정은 다 함께 떠난 삿포로 7일 여행..! 스시 오마카세, 호텔 로비에서 블루라벨을 마시며 나눈 딥토크, 로컬 오뎅탕에 된통 당한 날, 야키토리집의 나마비루들, 요이치 증류소 투어까지 조금의 티격태격과 감정의 요동은 우리가 더 가까워졌다는 증거로 남았습니다. 의외로 나와 내 주변을 돌아보게 된 여행으로 이 또한 오래 기억에 남을 여행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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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5주년의 치앙마이, 연애 8주년의 도쿄. 둘이 떠나는 여행이 이렇게까지 즐거울 수 있나 싶습니다. 20년 전엔 절친이었고, 연인이 된 지는 10년, 결혼한 지도 어느덧 5년이 넘었습니다. 치앙마이에서는 각자 혼자서는 정의하기 어려웠던 문제들을 차분히 꺼내놓고, 미처 드러내지 못했던 감정까지 털어냈고, 도쿄에서는 풋풋했던 연애 초기의 공간들을 다시 걸으며 지나온 시간 속 우리의 감정들을 돌아봤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꽤 멋있게 성장해왔다는 사실이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느껴졌죠. 얼마나 애써왔는지는 우리가 가장 잘 아니까. 서로가 고생했다고 말해주는 것만큼 값진 선물도 없는 것 같습니다.


48시간 찍먹 제주 여행,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중국 대련의 즉흥적인 호캉스 여행까지.

이제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떠나 행복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을 여러 개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참 든든합니다.


결론


돌아보면 2025년은 가족, 그리고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살아낸 시간이 유난히 선명했던 해였습니다.

쉽게 달렸고, 자주 떠났으며, 그 대부분의 시간을 가족과 함께 보냈습니다.


106번의 러닝과 수백 킬로미터의 길 위에서 몸과 마음을 돌봤고, 페스티벌과 여행 사이사이에서는 영혼의 에너지를 채웠습니다. 즉흥적으로 끊은 비행기 티켓, 페스티벌 티켓, 계획되지 않은 대화들이 2025년을 더 또렷하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이 모든 시간들은 사실 작년 회고에서 적어두었던 몇 줄의 문장에서 출발했습니다.

가족과 더 잘 시간 보내기.
달리기 꾸준히 하기.

돌이켜보면, 나는 그 문장들을 꽤 성실하게 살아냈습니다.

거창한 변화라기보다는, 고치고 싶다고 적어두었던 것들을 실제로 조금씩 고쳐낸 한 해였다는 점에서 이상하게도 더 뿌듯하게 남습니다.


결국 2025년은 내가 중요하다고 믿는 것들을 꾸준히 지켜낸 해에 가까웠던 것 같습니다.

조급함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 조급함에 끌려다니지 않는 법을 배웠고, 몸은 자주 움직였으며, 마음은 자주 웃었습니다.


이제 또 한 번, 어떤 한 해를 꾸려가면 좋을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려 합니다.

말로 적어두는 데서 그치지 않고, 실제로 살아낼 수 있다는 걸 이미 한 번은 해봤으니까요.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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