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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 슬픔과 기쁨

나의 첫 신용카드

by 김홍

20대 초년생 때 월급은 늘 통장을 스쳐 지나갔다. 월급날이 되어도 별 감흥이 없던 시절이다. 하루살이처럼 꾸역꾸역 버텼던 나날들이었다.

그 시절에는 '서울 가서 얼마 정도 버냐'라는 말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웠다. 그 질문을 받을 때마다 주눅 들었고, 좌절했고, 슬펐다.


누구에게도 떳떳하지 못했다. 진짜 '돈벌이'를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돈보다는 뭐, 명예로 사는 직업이라고 하는데, 개뿔 이건 진짜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했다.


돈에 쫓기고 쫓기던 20대 중반, 생애 처음으로 신용카드를 만들었다. 딱히 필요해서 만든 건 아니다. S카드 회사에 취직한 절친 P의 부탁으로 어쩔 수 없이 카드 하나를 뚫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 카드가 내 삶을 쥐락펴락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 신용카드 덕분에 그나마 서울살이를 이어갈 수 있었던 건지, 아니면 그 카드 때문에 내 삶이 더 피폐했는지는 알 수 없다.


우리 부모님은 한평생 신용카드를 쓴 적이 없는 분들이다. '할부'란 없는 삶을 사는 부모님 밑에서 자라다 보니 신용카드를 제대로 쓸 줄 몰랐다.


신용카드를 처음으로 접한 나는 망설임 없이 긁고 또 긁었다. 돈이 바로바로 빠져나가지 않으니까 그 소비가 얼마나 무서운지, 차곡차곡 쌓여가는 카드 내역이 어떤 후폭풍을 불러올지 몰랐다.


무이자 할부가 되는 건 다 할부로 돌렸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빚인 줄 모르고. 결국에는 오랜 기간 동안 카드값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카드값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괜히 카드를 만들라고 권유했던 P가 밉고 원망스럽기도 했다.

"언제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숨이 턱턱 막혔다. 아이러니하게도 신용카드 때문에 죽겠는데, 더 이상 신용카드 없이는 못 사는 삶이 됐다.

그런데 기회가 왔다. 위기는 기회라고 했던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집콕 생활이 가능해지면서 카드값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다.

강제 집콕 생활 덕분에 생활비가 눈에 띄게 줄었다. 쓸데없는 소비를 하지 않게 됐고, 나에게 꼭 필요한 소비가 무엇인지 고민하게 됐다. 단, 100원이라도 가치 있는 소비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코로나 상생 국민 지원금도 알뜰살뜰하게 사용했다.

그렇게 카드값이 다시 '0원'이 됐다. 그 이후부터는 웬만하면 절대 할부를 하지 않게 됐다. 휴대폰 값 등 고정비 지출도 꼼꼼히 다시 점검해서 불필요하게 새어나가는 돈도 막았다. 또, 운 좋게도 전셋집을 구해 월세 값도 세이브했다.


지옥 구렁텅이에서 벗어나 적금도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됐다. 꿈꾸던 직장인의 삶이 드디어 나에게도 시작된 거다.

여윳돈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마음 차이는 천지 차이였다. '당장 일을 때려치워도 굶지 않고 먹고살 수는 있어'라는 마인드로 살아야 더 건강하게 살 수 있다.


여전히 풍족하게 살진 못하지만 '돈'을 대하는 태도나 마음가짐은 코로나 시대 이전과 후는 완전히 다르다. '돈이 다가 아니야!'라는 말만 입에 달고 살았었는데,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다. 돈의 기쁨과 슬픔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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