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촌한옥마을은 100년 전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또 45년 전 아무 것도 없었던 한강매립지는 지금 어떻게 변했을까요? 과거 ‘북촌’과 ‘반포본동’ 주민들의 생활상과 변화들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조사 결과가 보고서로 발간되었습니다. 특히 상전벽해가 된 반포동 일대 사진이 인상적입니다. 오래 전 사진과 기록들을 통해 서울의 옛 모습을 생생하게 만나보세요.
장소를 인문학의 시선으로 탐구하는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생활문화자료조사’의 2018년 조사 성과를 담은 3권의 보고서가 5월 발간됐다.
북촌의 1863년부터의 장소의 이력과 연대를 기록한 <북촌,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의 터전>, 북촌일대 11개 집안의 이야기를 엮은 <북촌11가의 오래된 기억>, 한강 매립지에 세워진 반포주공아파트의 조성 과정과 주민들의 삶의 궤적을 담은 <남서울에서 구반포로>를 출판했다.
1부 : 북촌 1863~1962,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의 터전
현재 ‘한옥마을’이라고 불리는 북촌은 서울의 전통적인 주거지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북촌의 한옥은 1920~1930년대에 대부분 지어진 것들이고, 주를 차지하는 도시한옥 외에도 초가집, 판잣집들도 뒤섞인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였다.
<북촌,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의 터전>은 서울역사박물관이 기획하고 사단법인 문화도시연구소가 수행한 연구로 현재 북촌 경관이 형성된 주된 시기인 1863~1962년을 중심으로 과거 100년의 지형과 지리 등 장소적 변화와 사람들의 삶의 궤적을 인문적 관점으로 담았다.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의 오래된 터전인 북촌은 조선시대에는 창덕궁과 경복궁 사이의 주거지역으로 왕실 종친과 권력을 가진 경화사족들의 집터였다.
일제강점기에는 학교와 교회 등 근대시설이 들어서고 동시에 새롭게 부상한 재력가와 전문지식인들의 주거지로 대체되었고, 대형필지에는 중산층을 위한 도시한옥주거지가 새롭게 조성되었다.
북촌은 광복과 한국전쟁의 격동기를 겪으면서 생활기반을 잃은 주민들이 밀려나거나, 새롭게 주민들이 몰려들면서 원서동 구릉지에 무허가 판잣집이 들어서 주거지가 재편되었다.
대표적으로 ‘77로’라고 불리는 원서동 77번지 일대에는 화장실도 없는 판잣집이 늘어나 인근에 공동화장실과 공동수도가 설치되었다.
또한 북촌은 경기고, 휘문고, 중앙고, 대동상고, 경기여고(창덕여고), 덕성여고, 풍문여고 등 7개의 고등학교 밀집해 있었고, 북촌을 거점으로 윤보선, 여운형, 송진우, 김성수 등 정재계 유력인사가 활동했다. 이런 이유로 북촌은 강남개발 이전 서울사람이면 한번쯤은 살아보고 싶은 동네였다.
2부 : 북촌 11家의 오래된 기억
<북촌11家의 오래된 기억>에서는 북촌에 살았던 주민들의 ‘오래된 기억’을 통해 북촌 백년의 일상을 기록하였다. 집안과 거주시기, 동네와 가옥유형을 고려하면서 11개 집안을 구술대상으로 결정하고, 모두 18명의 구술을 정리하였다.
이재완의 며느리 ‘맹현아씨’가 남긴 회고록과 증손녀 이남주의 구술로 왕실 종친으로서의 법도와 의례, 일상생활과 음식문화를 기록하였다. 사당 참배로 시작하는 하루 일과, 며느리 간택에 직접 참여하는 반빗아치 등 세밀한 집안 문화를 들여다보았다.
1918년 안국동 8번지에 거주하기 시작한 윤보선가는 100년 넘게 이곳을 지켜오고 있는 북촌의 대표적인 집안이다. 윤보선은 정치가이기도 하지만 집안의 의식주를 직접 디자인하고 개선한 ‘스타일리스트’였다.
가옥, 가구, 조명, 식기, 의복, 음식 등의 전반을 개조하여 동서양이 결합된 윤보선가 만의 독특한 생활문화를 만들어냈다.
창덕궁과 맞닿은 원서동 빨래터 인근에 거주한 이상혁은 왜가리와 황새가 날아들고, 개나리가 풍성한 1940년대 동네의 풍경을 상세히 그려냈다.
새벽마다 물을 공급하던 북청 물장사 권씨, 송진우의 암살 현장 이야기, 고희동에게 세뱃돈 대신 그림을 받은 이야기 등 알려지지 않은 북촌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의사이자 흥사단 단원인 백인제는 북촌 인사들을 초대해 가든파티를 열어 교류망을 확대해 나갔고, 1928년부터 가회동의 일식가옥에 거주한 천도교인 오봉빈은 조선미술관을 운영한 최초의 전시기획자였으며, 북촌의 미술인, 천도교인 등과 폭넓게 교류하였다.
‘77로’라고 불리는 원서동 77번지는 골목이 좁아 시신을 담은 관도 통과하기 힘든 곳이었고, 현재 원서동 경로당 인근에는 공중수도와 공중변소가 있어 아침마다 민생고를 해결하려는 사람들이 늘 줄지어 있었다고 한다.
삼청공원에는 북촌 사람들이 이용하는 하천 변 목욕탕이 깊숙이 있었고, 집을 마련하지 못한 사람들이 지은 토굴집이 있기도 했다. 특히 삼청공원의 3개의 고사포 진지를 아이들은 ‘제1~3 히로시마’라고 부르기도 했다.
3부 : 반포본동, 남서울에서 구반포로
반포본동에 들어선 반포주공1단지는 1970년대 아파트 주거 유형을 선도한 기폭제 역할을 했으며, 오늘날 보편화된 아파트 단지의 초기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곧 재건축을 앞두고 있는 이 지역의 주거사적 의미와 공간적 특성은 무엇일까?
매립 이전의 반포본동은 서울시민의 채소공급지로 채소밭, 갈대밭, 모래밭, 버드나무가 어우러진 곳이었다.
전역이 침수지구이자 하천부지이고 교통사정이 불편한 비주거지역으로 1963년 서울에 편입되었음에도 서울로 인식되지 못하고 ‘남서울’로 불렸다.
1970년부터 2년간 한강 매립사업이 진행됐고, 이렇게 형성된 반포본동 16만 평의 대지를 매입해 대한주택공사가 3,786세대의 우리나라 최초의 대단위 아파트 단지를 건설했다.
1974년 준공된 반포주공1단지는 22평~64평으로 구성됐으며, 22평형의 층별 평균 가격이 395만 원, 42평형은 730만 4천 원이었다.
당시 400~500만 원대 아파트를 3년만에 구입하기 위해서는 한 달에 약 11~13만원 수준의 봉급을 받아야 했으며, 이는 서울 근로자 가구당 월평균 소득의 3배 가까운 수준이었다.
반포주공1단지는 국가의 산업발전을 위한 고급인력을 끌어들이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당시 정부는 외국 유학파와 교수, 정부 관료 등에 일정 세대를 할당해 특별분양했다.
당시 교수라 하더라도 아파트를 구매해 입주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기에 허위 신청서를 제출한 일부 교수들이 발각되어 사퇴하는 경우도 있었다.
작가 피천득, 문학평론가 김현, 조각가 윤영자, 김신조 목사, 서석준 전 부총리, 박영수 전 서울시장, 오원철 전 경제수석 등 고위공직자, 유명인들이 반포주공1단지에 거주했다.
반포주공 1단지는 남향을 우선시한 일자병렬 배치가 강하게 작용하였다. 이는 풍수지리학상으로 남향을 선호하는 사회문화적 배경과 당시 건축 기술, 대량 주택공급의 목적이 맞물려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곳의 특징 중 하나는 주동 간격이 매우 넓다는 점이다. 특히 주동 사이에 40여 년 시간 동안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자란 나무들은 심미적 조경 요소의 역할 외에도 단조로운 일자 배치 속에서 단지의 영역성과 공간을 인지하게 만드는 역할도 한다.
반포본동은 강남개발이 진행되기 전에 단지계획이 수립되어 사람들이 이용할 생활편의시설 등이 전무했으므로, 단지의 중심적 기능을 하도록 중앙 경계도로에 상가를 배치했다.
반포상가는 단순히 동네에서 재화와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능 외에도 준 공공영역으로서 주거를 보호해 주고, 공간을 인지하는 측면에서 이정표 역할을 하고 있다.
2018년 서울생활문화자료조사 보고서는, 서울책방과 서울역사박물관 뮤지엄숍에서 구매할 수 있다. 가격은 반포본동 2만 5,000원, 북촌 2권 세트가 4만 5,000원이다.
추후 2018년 서울생활문화자료조사 보고서 e-book과 관련 사진은 서울역사아카이브 홈페이지에 실릴 예정이다.
※ 문의 : 서울책방 02-739-7033 , 서울역사박물관 02-724-02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