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퇴는 무책임이 아니다
복직 후 나는 아직 회복이 필요하다는 사유로 업무량을 반으로 줄였다.
이상하게도 몸은 쉬어야 하는데 마음은 도망칠 틈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나는 여전히 밤까지 사무실을 떠나지 못했다.
활활 타고 있는 나를 식히기 위한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내 첫 번째 결심은 '6시 정시 퇴근'이었다.
10분 전 도착해 9시 정각에 일을 시작했고
오후 6시가 되면 진행 중인 일이 있더라도 미련 없이 자리를 떠났다.
일이 많으면 점심시간 한 시간 정도는 업무에 양보해 줬다.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 것 같은가?
놀랍도록 그 어떤 문제도 발생하지 않았다.
미리 안 했다가 문제가 생기면 어쩌지,
동료들이 나보고 무책임하다고 하면 어쩌지,
찜찜하게 사무실을 나서던 내 2주 간의 걱정이 무색해졌다.
오히려 내게 좋은 변화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하나, 내가 쓸 수 있는 시간이 짧아지니 일의 우선순위가 명확해졌다.
덕분에 내 시간과 노력을 중요도순으로 투입할 수 있게 됐다.
나의 경우 업무를 '중요도'와 '난이도' 두 축으로 분류하는데
나도 모르게 어려운 일을 미루고 쉬운 일부터 처리하느라 중요한 순간엔 늘 지쳐있었다.
이제 밤늦게까지 이걸 물고 늘어질 수 없으니
심호흡 한 번 하고 중요한 일에 빠르게 부딪히는 좋은 습관이 생겼다.
둘, 내가 꼭 참여하지 않아도 되는 일은 느슨하게 두는 것도 배웠다.
이전까지 나는 모니터링 같은 간단한 일도 일일이 확인해야 직성이 풀렸다.
팀에 합류한 초반 실수가 잦았던 막내 직원을 온전히 믿지 못하고
그녀가 주는 업무를 하나하나 샅샅이 살폈기 때문이다.
눈 딱 감고 대세에 지장이 없을 수준이면 통과시키자
나는 시간과 노력을 아끼고 그녀는 스스로 성장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지금 와 생각하면 "내가 여기서 가장 책임감 있어"라는 교만함이 아니었나 싶다.
셋, 그럼에도 시간이 부족해 내가 못 하는 일은 그냥 두거나 없애봤다.
비밀인데 내가 안 한 지 아무도 모르길래 헛웃음이 났다.
이렇게 중요하지 않은 문제를 내가 꼭 쥐고 나를 다 태우고 있었구나 어이가 없었다.
회사에 나를 오래 묶어 놨던 건
하나부터 열까지 내가 다 쥐고 해내야 한다고 믿었던 나 자신이었다.
나는 뭐가 그렇게 두려웠을까.
사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좋은 걸 더 하는 것보다 불편한 걸 멈추는 걸지 모른다.
나는 오늘도 멈추는 데 용기를 쓰고
6시가 되면 미련 없이 회사를 떠난다, 안녕!
당신도 오늘, 당신을 데리러 가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