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추는 록시
아, 오늘도 버텼다. 지긋지긋하다.
매일 발톱 세우는 재규어 같은 제랄린, 그 옆에 하이에나 파툴린.
진짜 찌질하다. 소산나하나 때문에 회사가 들썩인다.
나는 물러난 게 아니다.
다만 ‘잠시’ 뒤로 서 있는 것뿐이다.
사람들은 내가 패배했다고 믿는다.
그 믿음을 나는 굳이 깨지 않는다.
패배자처럼 보여야, 안전하니까.
이 게임은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이 아니라,
조용히 웃는 사람이 끝내 이긴다.
요즘 사무실은 정적 속에서 덜컥거린다.
한사람이라도 자칫하면 터져버릴 시한폭탄,
내 앞에서 터지면 안된다. 나는 들리지 않는 총격 속에서도 자리를 지켜야 한다.
이상하지?
파국 직전의 공기에서 나는 묘하게 살아있다.
소산나의 이름은 아직도 회의실 테이블을 떠돈다.
누군가는 그녀를 ‘빠르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위험하다’고 속삭인다.
나는 웃었다.
둘 다 맞는 말이니까.
하지만 진짜 위험한 건,
빠른 사람이 아니라 빠른 사람을 견디지 못하는 조직이지.
제랄린은 여전히 불안을 향해 예의를 차리고,
파툴린은 그 불안을 애정처럼 핥는다.
나는 그 두 사람의 틈을 본다.
그 틈은 마치 얇은 금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아야만 넓어지는 균열이다.
나는 이 모든 걸 기록하지 않는다.
아니, ‘기록하지 않는다는 기록’을 남긴다. 누가 내 마음을 캐묻더라도,
“그건 오프 더 레코드입니다.”
라고 말할 생각이다. 나의 시선, 나의 판단, 나의 의도 모두는 비공식으로 남겨둔다.
나의 시선과 판단은 정확했다. 누구든 내말에 다 맞다고 맞장구를 쳤었다.
이번엔 묘하게 빗겨나갔다. 불씨는 내가 지폈다.
파툴린의 언어 속에 작은 모순 하나를 심었다.
그녀는 그걸 자기도 모르게 제랄린에게 옮겼다.
단어 하나, 어조 하나가 사람을 갈라놓을 수 있다는 걸 그들은 아직 모른다.
나는 불을 지피고, 뒤로 물러났다.
그 화염이 어디까지 번질지는 상관없었다.
그저, 내 위치, 나의 자리를 지키고 나를 증명하고 싶었을 뿐이다.
요즘 들어 눈빛이 자꾸 먼저 움직인다.
몸은 평온한 척하지만, 마음은 계속 바닥을 긁는다.
눈 뒤로 본심을 숨긴다 해도 진실은 그늘에 남는다.
사람들은 나의 시선을 피하지만, 나는 그들의 눈동자 속에서 나를 본다.
이곳은 모두가 서로를 감시하는 수족관이다.
투명하지만 숨 막히는 공간.
누군가는 웃음을 흘리고,
누군가는 그 웃음의 의미를 추적한다.
나는 그 사이를 유영한다.
하루 는, 회의시간에 소산나에게 눈 마주침을 시도했다.
소산나는 나를 봤다. 하지만 마주치지 않았다.
나는 얼굴이 달아올라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나를 보는지 모르겠지만. 더이상 나는 소산나를 쳐다볼 수 없었다.
어떤 메세지도 읽을 수 없었다.
소산나에게 받은 네이트온 한문장. 공론화 한 이후로 나는 매장됐다.
무덤속에 있는듯 했다.
나는 내가 옳다고 믿었다. 그런데 옳음은, 언제나 불편한 사람에게 벌을 준다.
"제기랄, 이게 뭐야!
다들 소산나 편이 아닌줄 알았는데??? 지금 이상황 뭐지?
나만 우습게 됐네?"
그 후로 소산나의 눈빛은 내 레이더에 오래 머물렀다.
그녀도 알고 있었을 내가 눈 마추지 못한다는 것을.
조용함이란, 가장 완벽한 복수의 전조라는 걸.
웬만해서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모든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사무실은 여전히 멀쩡한 척하지만,
나는 안다. 소산나를 향한 제랄린의 공격지시, 파툴린의 돌격.
이곳은 이미 한 번 무너진 무대다. 우습게도 모두 소산나에게 패했다.
조명이 꺼지고, 커튼이 닫힌 그 뒤에서
나는 다시 발끝을 맞추고 있다.
누구보다 조용하게,
누구보다 정확하게.
언젠가 다시 불이 켜지면,
이번엔 무대 위가 아니라,
뒤편의 조명실에서
내가 스위치를 내릴 것이다.
나는 나를 지키려다, 나를 잃고 있었다.
소산나를 미워하면서도, 닮아가고 있었다.
이 판에서 살아남는 건 언제나, 가장 많이 침묵한 사람이다.
파툴린: 소산나, 오늘 급하다고 했던 계약서류 발행은 완료하셨나요?
소산나: 네? 메일 오면 진행하라고 해서 아직입니다.
파툴린: 네? 안하셨다구요? 그 건은 급한 건인데. 그 것 부터 하셔야죠?
소산나: ...
제랄린: 그럼, 어떻게?
그 말은 사무실 전체에 던져진 도화선이었다.
"소산나가 봤을지 모르겠다. "
「속도는 다를 수 있다. 중요한 건, 같은 방향에 서 있다는 것」
금주의 인사이트, 오늘의 위안.
그래, 그렇게 믿어야만 했다.
그래야 내가 여전히 이 판 위에 있다고 느낄 수 있으니까.
“모든 권력은 결국, 비공식의 공간에서 태어난다.
그리고 나는, 그 비공식 속에서 다시 춤을 추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