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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연정 Dec 07. 2022

[문답칠일 04]도무지 치료가 불가능 직업병?

이 글은 지난해 청년기획자 플랫폼11111에서 진행된 프로젝트 <문답칠일>에 작성한 것을 그대로 발췌해 가져온 것입니다. 문답칠일은 기획자들에게 의미 있는 질문을 고르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글로 하는 프로젝트였습니다.

오늘은 네 번째 답변인데요. 네 번째 질문은 제가 한 것이었답니다.


도무지 이것만은 치료가 불가능할 것 같은, 여러분만의 직업병은 무엇인가요?


예전에 극단에서 일하던 시절, 한 배우분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요.

“연정아, 너는 뭐랄까. 여자 유재석 같아.”

유재석씨는 국민 MC로 전 국민적인 사랑을 받고 있는 분이고, 그만큼 많은 장점을 갖고 계신 분이기도 하죠. 어떤 의미로 그런 말을 하시는 건지 궁금했는데, 이내 연유를 들을 수 있었어요.

제가 사람들이 말할 때마다 반응을 참 잘 한다고. 또 대화에 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부러 화제를 그 사람에게 돌려 챙겨주려는 습성이 있더라고요. 이건 아마도 제가 기자 생활을 할 때 몸에 밴 습관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예술이 좋았어요. 대학교 때도 공강 시간이면, 먼 친척분이 하시는 서예학원에 다니곤 했었죠. 정성스레 한 자, 한 자 쓰는 게 그렇게 좋더라고요. 그리고 공연을 볼 때 가슴이 뛰고, 전시를 보고 나면 행복해지는 사람이었어요.

제가 좋아해 마지않는 이 세계에서 일하는 것은 아직도 믿을 수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단순히 좋아하는 것에서 그치리라 생각했지, 이렇게 실제로 일을 하게 될 줄은 몰랐거든요.



러나 관객의 시선에서 무대를 보는 것과 좋은 무대를 만들기 위해 일하는 과정은 결코 녹록지 않았습니다. 그 시간이 쌓이고 쌓여 10년이 훌쩍 넘자 이제는 공연이나 축제를 그냥 즐길 수만은 없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공연에 한껏 몰입해 울고 웃던 관객의 시선은 어느새 사라지고, 프로그램의 모든 요소요소를 살펴보고, 관객들의 반응을 더 눈여겨보는 기획자의 눈을 갖게 된 것입니다.


가끔은 마음이나 감각이 아니라 이성과 판단이 앞서는 저를 볼 때 조금은 서글픈 느낌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토록 좋아하는 것을 그저 순수하게 즐길 수만 없다는 사실 때문에요.


극장에 들어서면, 객석이 마치 엑셀 파일의 칸처럼 보일 때도 있었습니다. 기획자는 잘해도 욕을 먹고, 못해도 욕을 먹는다는 말을 들으며 살아왔는데, 판매 현황이 좋지 않은 날에는 더더욱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실감했습니다. 이 모든 객석을 다 팔아야만 하는 무거운 짐을 진 보부상의 마음, 혹은 차가운 손을 비비면서 성냥을 팔아야만 하는 성냥팔이 소녀처럼 빈 객석을 볼 때면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동료 기획자가 기획한 프로젝트의 객석 판매 상황이 좋지 않다고 하면 열일 제쳐두고 달려가게 되었습니다. 그 마음을 제가 너무나 잘 아니까요.


혹여나 모르는 사람이 기획한 공연이라고 해도 그 공연장의 객석이 많이 비어있을 경우에는 마음이 아려오곤 했습니다. 같이 간 친구는 이 공연이랑 너랑 아무 상관도 없는데 관객석이 비든 말든 무슨 상관이냐고 걱정 말라고 하곤 했어요. 그러나 그 마음을 내려놓기 힘들더군요.


다른 어느 직군도 같을까요? 저는 다른 기획자의 프로젝트를 한 번도 남 일이라고 느껴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기획자의 마음을 누구보다 더 잘 알기 때문일 겁니다. 기획자는 그래서 늘 같은 공감의 병을 앓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청년 기획자 플랫폼에서도 그걸 너무나 잘 느끼고 있거든요.


물론 무엇을 보든 간에 평론가라도 된 양, 이건 좋다, 이건 아쉽다 마음속으로는 수십 번 생각합니다. 그러나 절대로 동료 기획자에게는 부정적인 평가를 전한 기억이 없어요. ‘고생했다’하는 한 마디가 전부입니다.


병이라는 단어는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만, 우리가 하는 일을 그다지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토록 뜨거운 열병을 앓을 일도 없지 않았을까요? 너무나 좋아하기 때문에 사소한 일에도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반응하는 것이라 믿어봅니다. 지독한 열병을 앓고 계신 기획자 여러분, 축하드립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을 이토록 끔찍이 사랑한다는 걸 온몸으로 확인하고 있는 셈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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