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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규 Jan 04. 2017

세월호 "깊고 아린 상처"

힘든 이야기를 해야 할 차례가 되었다.


세월호 사고는 많은 분들에게도 그렇지만 나에게도 깊고 아린 상처로 남아있다. 사고 당일 사건 속보를 보고서 처음에는 내려가지 않으려고 했다. 국회의원 의전하느라 인명구조에 방해가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소방방재청장에게 전화하니 이미 헬기로 내려가는 중이라고 하여 구조에 만전을 기해달라는 당부만 남겼다. 그런데 전원구조가 오보로 밝혀지면서 도저히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팽목항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아이들 살려내라고, 당장 바다 속에 들어가 아이들 구조하라는 엄마 아빠들의 애타는 목소리가 처절함을 넘어 분노가 되어, 애간장을 녹이는 비수가 되어, 어찌할 도리 없이 피붙이 죽는 시간을 같이 겪어야 하는 잔인함이 야수가 되어 팽목항은 피울음 천지였다.


나도 정신이 나갔다. 엄마 아빠들이 바다에 금방 뛰어들 것 같고, 울부짖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리고, 보이는 족족 해경들은 답변조차 못해 두들겨 맞고.. 그렇게 며칠이 흘러갔다.


지역구 순천과 가깝기도 하고, 해경 해수부를 관할하는 농해수위 김선동 의원이 3일만에 내려왔다. 해양 전문가와 즉석 토론회도 하고 어떻게 사태를 수습해야 하는지 논의도 했지만 한 명의 구조자도 없는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팽목항 현장은 김선동 의원이 맡기로 하고 서울로 올라가기 위해 목포역으로 향했다. 진도대교를 넘어서는데 그제야 세월호 사고가 머리에 떠올려졌다.


'아! 한 명도 못 구했구나.'

'저 아이들 두고 여기서 떠나면 안 되는데...'

'왜 아무 것도 못했지, 한 명도 못 구했잖아, 여기를 지켜야 하는데, 아이들과 같이 있어야 하는데...'


어느덧 눈물이 쏟아졌다. 펑펑 쏟아져 주체할 수 없었다. 목포역에 도착해서도 그 주변 조용하고 아늑한 풍경에서 울고 또 울었다. 차가운 바다물에 빠져있을 아이들을 두고, 그 아이들을 찾느라고 울부짖는 엄마 아빠들을 두고 떠난다는게 너무 죄스러웠다. 아무런 도움도 안되는 국회의원이라는 직이 한스럽기만 했다. 아프고 힘들었다.


4월 16일 이후 2014년 내내 나에게 밤시간은 둘 중 하나였다. 술에 취해 있거나 밤새 울거나... 상임위에서, 본회의에서 세월호 관련 질의를 준비할 때면 집에 들어가질 못하고 의원회관에서 질의서를 검토하다가 울고 울고, 혼자 미쳐서 돌아다녔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처음 국회에 들어왔을때, 엄마들이든 아빠들이든 분노와 격정, 적대감과 짙은 슬픔이 아우라처럼 온몸을 감싸 있었다. 난 그 모습이 성자처럼 느껴졌다. 커다란 아픔과 상실을 겪으며 유가족들은 그냥 단련된 정도가 아니라 어떤 경지에 오른 듯했다. 얼마나 아프고, 얼마나 서러울까!


국회에서 농성하던 세월호 유가족들과 만났던 장면


국회에서 청와대에서 농성을 하며 밥도 같이 먹게 되고, 밤도 새면서 한 분 한 분 통성명을 하고, 전화번호도 받았다. 가까이에 있긴 했으나 늘 어려웠다. 유가족을 막는 자, 누구에게든 국회의원으로서 내 권한을 최대한 활용했지만 유가족들 앞에서 국회의원 행세를 할 수는 없었다.

세월호 관련된 각종 의혹을 캐기 위해 진도VTS에도 여러번 가고, 서해해경청, 전남소방본부도 들렀지만 가장 많이, 매주 매달 찾은 곳이 미수습자 가족들이 남아 계셨던 팽목항과 체육관이었다. 한 번도 국회의원이라고 소개하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갈 때마다 은화 어머니에게 엄청 깨지고 혼나기만 했다. 혼내주는 게 다행스러울 정도였다. 가족들이 숙소로 돌아가고 나면 팽목항에 살다시피 하던 준형 아빠에게 잡혀 또 다시 혼났다. 처음엔 당신들 뭐하는 것들이냐며 화를 내시다가 좀 지나면서는 술잔도 건네고 서로 붙잡고 우는 사이가 되었다.


사고 이후 단 한명도 구조하지 못한 대한민국, 그리고 그 국회의원으로서 난 죄인이었다. 밤마다 하얗게 울면서 다짐하고 다짐했던 말.

"반드시 찾으리라. 반드시 밝혀내리라."



사고 당시 페이스북글



2014년 4월 19일

진도를 떠나 서울로 올라가는 중입니다. 현장에 있다보니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요일감각도 없어졌네요. 목포역이 낯선 이국 같아 보입니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고 아이들 생각에 눈물만 납니다. 눈앞에서 아이들 죽어가는 걸 보고있자니 너무 슬프고 힘듭니다.

현장에는 구호물품, 음식 넘쳐납니다. 가족들 반, 각종 정부기관과 언론 기자들 반에 자원봉사자도 넘쳐납니다. 부족한 건 딱 하나, 구조와 생존자입니다. 시간은 자꾸 가는데 모든걸 구조에 집중시켜야 하는데 애간장이 탑니다.

현장에서도 느꼈지만 목포에서 여러 기사들 보니 발표혼선에, 원인의혹에 총체적 부실 난국입니다. 아니 숫자도 못 세고, 선체진입여부도 헛갈리고... 배가 급선회해서 거꾸로 올라가는 중에 왜 구조요청이나 긴급조치를 안했는지 이해가 안됩니다. 이건 승객들 죽음으로 내몰은 겁니다.
화나서 미치겠구 눈물만 나네...

진도 내려가는 비행기에서는 안행부 2차관을 만났는데, 서울 올라가는 기차에서는 또 1차관을 만났습니다.

몸은 힘들어도 한마디 했습니다. 구조와 수습 제대로 못하면 큰 일 난다, 첫날 구조인원 숫자 파악도 못해서 정부스스로 신뢰를 무너뜨리고도 같은 잘못을 반복하냐, 팽목항과 체육관에 있는 실종자가족들이 전체 국민이다, 그분들께 책임있게 답변해라, 생존자 구조에 총력을 다해라...
구조에 아무 도움도 못 주는 제가 야속하기만 합니다.


2014년 6월 15일

어제밤 소주잔 기울이며 실종자 가족과 이야기했습니다.

그냥 잠바를 입고 갔는데 한분이 "혹시 국회의원 아니냐?"해서 "이상규의원입니다" 했더니 "아! 통진당" 하면서 자리를 내주었습니다.

국조특위냐 - 아닙니다. 다만 가족들이 조사위원으로 추천해주셨습니다 - 그래 뭘 조사할꺼냐 해서 주요 의혹을 말씀드리고 진도관제센터에서 직접 본 세월호 항적도의 문제점을 짚으니 희생자 가족 중 진상규명팀에 있다는 분과 급속도로 이야기가 진전됐습니다.

한참 그러는데 실종자 가족 한분이 "난 국회의원들 꼴보기 싫다. 뺏지달고 비서관 카메라기자들 몰고다니며 뭐 하는 짓이냐?"

"국조특위 의원들이 처음와서 우리한테 무얼 도와드리면 되겠느냐 하는데 기가 막히더라. 이러저러하게 조사하려고 하는데 괜찮냐 이렇게 나와야지 지금까지 진행된... 사항조차 몰라서 우리가 그걸 가르쳐주어야 하냐? 기본도 안돼있어."

"우린 구조가 최우선이다. 장관하고는 이제 정도 들어버렸고 장관-청장 여기서 못 나간다, 이 사람들마저 바뀌면 또 초자가 와서 처음부터 다시 하게? 국조특위 의원들에게 분명히 전해라. 차라리 너희들이 진도 와서 국정조사해라."

"이러다가 내 새끼 못찾는 건 아닌지 아주 미치겠다. 여기서 아예 농사지으면서 살까? 살면서 내 새끼 기다릴까? 아니면 그냥 안산으로 올라갈까? 여기나 거기나 기다리는건 똑같지. 아니야 아빠 갔다고 이놈이 섭섭해서 안나오면 안되지. 하루에도 공상소설을 몇개를 쓴다."

"하두 가슴이 아파 한의사 찾아가니 진맥하고는 이건 침으로 낫는 병이 아닙니다 하면서 심호흡하는 법 가르쳐주고 침놔주더라. 홧병이야. 화가 나는게 아니라 눈물만 나와. 저 등대 뒤에서 사진보며 운다. 아 울지 말아야 하는데.. 의원이고 뭐고 필요없어, 같이 있어줘야 해. 가족들도 큰소리만 치고 인터뷰나 하는 사람들은 싫다. 그냥 옆에 같이 있어주는 가족들은 다 이모 고모고 형 동생이 된다."

"이제 12명 남았어. 이러다 한두명 남으면 어쩌냐? 덜컥 겁이 난다. 12명 같이 있어도 함든데 어떻게 감당하겠냐? 아 생각하기도 싫다. 그러니까 우린 내 새끼 찾는게 제일 중요해, 딴건 없어. 여기 근처에 아무도 오지말라 해도 이놈저놈 다 와, 기자놈들 왜 그렇게 찾아와? 이젠 신경도 안써, 오든말든 내 새끼만 찾으면 돼, 내 새끼 찾아야 하는데..."

자리에 일어서며 국조특위 의원들에게 꼭 전하겠다고 말하려는데 눈물이 쏟아진다. 울 수가 없어 말을 삼켰다. 밤이 까맣게 타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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