얻어야 할 사람이 있는데 생각이 좀 다르거나, 나와는 다른 세력에 속해있을 때 어떻게 할까?
보통은 설득을 하려고 한다. 그래서 논리를 앞세우거나 근거를 들이대는데 다가갈수록 더 멀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먹물들이 흔히 범하는 오류이자 착각이다.
논쟁을 통해서 상대를 제압하면 관계는 오히려 깨진다. 독설로 유명짜한 논객들을 봐라. 호불호가 있겠으나 주변관계는 대개 좋지 않다.
그래서 설득보다는 공감이다. 마음을 얻어야 사람을 얻는 법이니 신영복 선생님 말씀처럼 같은 곳을 보거나, 같은 처지에 있어야 교감이 되고 공감이 이루어진다.
공감하려면 우선은 이기려 해서는 안된다. 다름을 인정하는데서 시작한다. 운동권 문자로는 '구동존이'다. 관계로 보자면 '편안함'이 기본으로 깔려 있어야 한다.
공감하려면 공동의 경험, 그것도 진한 투쟁을 공유하는게 최고다. 군사용어로는 '전우애'인데 큰 투쟁을 하면서 생사고락을 같이 하면 아주 진한 공감대, 일체감이 형성된다. 그래서 정파가 달라도 이 공감이 있기에 끈끈한 동지가 되기도 한다.
현장 일하며 크게 깨닫는 것 중 하나가 '처지의 같음에서 오는 동류의식'이다.
이건 말로 설명이 안되는 영역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타고난 놈에게는 안 된다.
타고난 놈이 부지런하고 노력까지 하면 당해낼 도리가 없다.
그래서 '자신'을 먼저 파악해야 한다. 뭘 잘 하는지, 언제 즐겁고 재미있는지, '자신'을 발굴하고 그 분야로 가야 한다.
인사의 기준도 이런 면을 봐야 하지 않을까?
진보진영이라고 의무감으로 자기에게 맞지 않는 일을 억지로 할 수는 없다. 그리고 진보운동을 한다고 팔방미인이 되려고 하거나, 요구하는 것도 시대착오다.
현장 체질이라면 노동운동이나 농민운동을, 정무감각이 있다면 당운동이 적격일 것이다.
촌철살인 한 줄 문장이 가능하면 대변인이고 마이크를 잡고 편하거나 신이 나면 사회자이다. 사람 만나기 좋아하면 조직영역에, 꾀가 많으면 기획영역에, 연구능력이 있으면 정책영역이다.
가수나 운동선수 같은 예체능은 말할 것도 없고 기업가나기자도 타고난 사람들이 있다. 타고났는데다 시간을 투여하여 집중하면서 쌓아올리면 그 분야 장인이 되는 것이다.
물론 모두에게 장인이 되라고 권하지 않는다. 안되는 걸 억지로, 책임의식에 짓눌려 하지는 말자. 자기가 잘 하는 것, 좋아하는 영역에서 시작하자.
범생이가 일을 내는 걸 본 적이 없다.
틀에 박혀서 뛰쳐 나오질 못하고 그 안에서 뱅뱅 돌기만 한다.
20대 시절, 년수로는 80년대 학생들 데모에는 민주화 열망만으로 돌진한게 아니라 기발하고 도전적 방식이 많이 시도되었다. 민정당사 점거농성, 미문화원 진입, 고연전에 맞춘 가두집회, 생산지 정투, 농활-공활, 현장투신... 이제는 먼 옛날 이야기지만 당시에는 파격이었다.
노동조합도 조합원들의 지혜가 모이면 기발한 투쟁방식이 제안되고 결국 협상을 유리하게 끌어갔다. 익산CC 골프장 노조 투쟁에서 초반에 회사측의 크고 작은 도발들이 끊이지 않았으나 조합원들의 단결과 연대의 힘으로 잘 버텨냈다. 그러자 곧 대전투가 벌어졌다. 손님을 가장한 구사대가 새벽에 불의의 습격을 가해서 골프장을 장악하기 직전의 급박한 상황이 되었다. 그런데 여성 조합원들이 순간 기지를 발휘하여 선두로 치고 나오는 구사대 한 놈을 에워싸고 카트를 고장내버렸다. 필드로 진입은 불가능해지고, 주변엔 조합원들이 대거 둘러싸자 구사대들은 당황 -> 주춤 -> 포기하고 퇴각하기 시작했다. 이 상황을 몰래 지켜보던 회사 관리자가 들켜서 그 넓은 필드로 줄행랑을 치다가 넘어지고, 고꾸라지고, 가관이었다. 전세는 단번에 역전되고 조합원들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결국 캐디 조합원까지 모두 노동자로 인정받는 단협을 체결하여 골프장 노조투쟁의 새 지평을 열었다.
미군 장갑차에 희생된 효순이-미선이 촛불 때 광화문에서 경찰벽을 허물고 미대사관 앞까지 대오가 진출한 감격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성동격서 작전으로 몇몇 깃발이 이순신 장군 동상 너머에 나타나자 경찰들이 당황하면서 순식간에 허물어지고. 촛불 시민들과 경찰이 함께 미대사관을 향해 달리는 역사의 한 장면이 펼쳐졌다.
새로운 방식, 창의적 도전은 개인의 기질에서 나오는게 아니다. 조직구조와 문화가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의원 시절에 무협 형식을 빌려서 통합진보당 사태의 전말을 밝히는 글을 썼는데, 주요 당간부들이 일제히 출판을 반대했다. 여러 가지 이유 중에 '진보당 의원으로서 무게'가 떨어진다는게 주된 거였다. 의원이 꼭 무게를 잡아야 하나? 진보당에서 무협은 안되나? 우리 안에도 권위주의가 있을 수 있다.
민중당 시절에 이런 틀을 깨려고 나름 노력했다.
상임대표로서 의전을 요구하지 않았다. 여전히 '반미-반제'라는 표현의 투쟁 방향에 대해 문제의식을 제기했다. 사법적폐 투쟁에는 동의하나 이석기 석방 구호는 안된다는 주장들을 실천을 통해 정면돌파했다.
일상 당생활에서 나는 넥타이를 매지 않았고, 사무총장은 여름에 반바지로 출근했다. 밖으로 크게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중앙당에서는 파격이었다. 이런 시도와 작은 변화들이 향후 진보당의 활기와 혁신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코로나 바이러스보다 훨씬 위험한 각종 세균무기가 한반도로 몰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