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당 글은 2022년 10월 5일에 빅이슈 코리아에 기고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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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igissue.kr/magazine/new/309/1924
세운상가 옆 아세아극장
아세아 극장
철거를 앞둔 건물 외벽이 벗겨졌다. 다섯글자가 보였다. 건물보다 더 돋보였다. 지나갔던 시간이 잠시 돌아왔다. 극장이라고 적혀 있지만 어떤 곳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상상에 맡길 수 밖에 없었다. 극장을 본 적도, 경험한 적도 없는데 왠지 모르게 가슴이 웅장해졌다. 세상이 떠들썩해질 만큼의 유적지도 아니었다. 그저 과거의 공간이라는 것만으로도 울림이 전해졌다. 고작 다섯글자만으로도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남겨진 흔적 자체만으로도 의미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누군가의 기억을 소환하고, 과거의 시간을 불러온다.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았던 세운상가군 사이에서 한 때 존재감을 알렸던 아세아 극장이다. 재개발로 철거가 확정되지 않았더라면 극장의 존재를 알게 되는 것에는 좀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그저 누군가의 기억 속에, 한때의 역사 위에 놓여 스쳐 지나갔을 테다. 이처럼 재개발 대상지를 다니다 보면 예상치 못한 장면들이 이따금 등장하고, 우연의 순간들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그럴 때마다 '재개발'이라는 행위에 대해 다시금 곱씹고, 의미를 묻는다. 옳고 그름의 판단을 넘어서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 그 영향력에 대해서 짚어 본다.
#재개발이란 뭘까? 재개발로 얻는 것과 잃는 것은?
객관적으로 명확히 설명될 수 있는 부분도 있고, 없는 부분도 있다. 상황과 맥락이 너무 복잡해서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쓸리기도 한다. 과거의 시간이 드러나서 반갑긴 하지만, 곧 철거를 앞두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을 인지하면 호기심으로 가득 찼던 마음은 금세 가라 앉는다.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나오던 궁금증은 어느샌가 사라지고 한껏 예민했던 감각은 잠잠해진다.
아세아극장은 세운상가 옆에 위치한 아세아상가에 있었다. 상가는 건축물대장상 준공일자가 1948년 5월 6일이고, 극장을 위해 1962년 8월, 2층 건물을 6층으로 높이는 증축공사를 했다.
당시 상가는 '아세아백화점'으로도 불렸다. 극장은 1967년 동아극장으로 개명했다가 아세아극장으로 다시 복귀했다. 1960~70년대에 극장은 사람들로 북적댔고, 8~90년대에는 전자상가가 들어서면서 부흥기를 누렸다. 하지만 90년대 말, 극장은 동시상영극장으로 운영되다가 2001년 경영난으로 폐쇄되었다. 당시 1~2층에는 전자제품 상가가 있었으나 극장이 폐쇄되고 6층까지 전자제품 점포가 들어서면서 상가로 변화했고, 영업은 계속 되었다. 2021년에는 인근 예지동 시계골목과 함께 세운4구역 도시환경정비구역으로 지정된 이후 재개발 사업을 추진하게 되고, 2022년 마침내 철거를 앞두고 있다.
어쩌면 아세아전자상가 철거는 이미 오래전부터 예상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비디오, DVD로 영화를 볼 수 있는 시대가 오면서 그 많던 극장이 사라진 것 처럼 말이다. 찾는 이가 없어 한참 진열장에 놓여 있던 전자제품들이 더 이상 갈곳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그 순간에 찾아온 자연스러운 변화 말이다. 늘 재개발 대상지를 바라본서 안타깝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는데 아세아전자상가의 경우 이상하게도 쉽게 설득이 되었다. 어떤 지점들이 연결되어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된 것일까?
전자상가와 극장은 사라질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것일까? 시대의 변화에 영향을 많이 받는 업종이라 그 운명을 당연하다고 받아들이고 생각하게 된 것 같다. 일반적으로 재개발이라는 행위는 시대의 변화에 의해서 당연하게 진행되는 결과로 보인다. 하지만 그 영향을 받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이해와 안타까움이라는 감정적 결과의 반복을 통해 자신이 살아가는 도시의 조직이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지 묻게 되고 그 영향력 아래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고민하게 된다.
'이곳은 '아세아백화점'이라고 불리면서, 옆에 붙어 잇는 세운전자상가와 광도전자백화점, 황금전자상가 등과 함께 8-90년대 청계천 일대 전자산업의 부흥기를 이끌었다. 지금도 아세아전자상가에는 음향기기, 조명기기, 전자부품, 공구 등을 판매하는 여러 업체들이 있다. 그러나 아세아전자상가가 역사 속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2021년 말 철거를 앞둔 세운 4구역 재개발 사업으로 인해, 상가 건물이 철거되고 세입자들이 이주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청계천 복원사업이후 재개발 일정이 지연되면서 보상과 대책 문제가 복잡하게 꼬였고, 시행사인 SS에서 세입자 상인에 대한 대책을 세우지 않아서 상인들도 오갈 곳 없는 신세가 되었다. 특히 아세아전자상가의 몇 몇 상인들은 청계천 상권을 떠나서는 장사를 이어가기 어렵기 때문에, SS에서 세입자 대책으로 상인들이 영업을 지속할 수 있는 임시상가를 만들어 주길 원했다. 촬영이후, 상인들은 재개발 문제가 장기화 되면서 심신이 지쳐 더 이상 싸우지 못하고, 11월 말일에 각자 영업을 지속할 수 있는 공간을 찾아 이주했다. 현재 아세아 전자상가는 텅 비어 다가올 철거를 기다리는 상태다.'
<아세아전자상가>, 청계천 을지로 보존연대, 2021년 12월 8일자
#을지유람 그리고 노가리 골목
2016년 처음으로 을지로 골목을 걸었다. 평소엔 잘 알지 못했던 을지로의 내면을 들여다 보는 기분이었다. 좁지만 한 없이 연결된 골목을 걷다보니 마치 다른 세상에 있는 느낌이었다. 골목길을 따라 수도 없이 펼쳐지는 공구상들, 그 사이에 작지만 샘물같은 휴식공간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든든하게 배를 채울 수 있는 식당들도 있어 찾아가는 재미도 있었다. 을지로에 형성된 생태계가 잘 돌아갈 수 있도록 필요한 것들이 자리를 지키고 제 역할을 해내고 있음을 깨닫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렇게 '을지유람'이라고 불리는 투어를 통해 을지로의 장소성과 시간에 대해 마주하게 되었다.
우연히 해질녘에 을지로 골목을 거닌 적이 있었다. 공구상만 모여 있는 골목과는 또 다른 분위기를 가진 맥주와 함께 안주로 노가리를 파는 노가리 골목이었다. 인근에는 골뱅이 골목도 있었다. 공구상가 골목과 이어지는 중간 지점에 위치하여 지름길이기도 했던 곳이다. 돌아가지 않으려면 이 길을 통과했어야 했는데, 환한 조명과 시끌벅적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마치 잠시 쉬다 가라는 듯 손을 내미는 것 같았다. 그저 이 풍경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흥겹고, 에너지가 생겼다. 을지로 일대의 사장님들 또한 일을 끝내놓고 집으로 향하는 길에 들려 잠깐의 위로를 받았던 장소가 아니었을까? 인근 직장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을 테다. 노가리를 판매할 뿐만 아니라 골목길 사이에는 식당과 공구상이 있다. 이런 요소들이 을지로만의 특별함을 만들었다. 고층빌딩이 즐비한 구역을 벗어나면 한없이 작고 아담한 건물들이 서로 벽을 맞대고 지지하며 자리한 곳, 그래서 눈을 어디에다 두어야 할지 혼란스러운 곳, 이 자체를 개별적 단위로 바라보기보다는 개별적 단위가 서로 연결된 하나의 도시 조직으로 생태계로 봐야 하는 곳이다. 이 자체만으로도 특수한 도시 생태계가 존재하는 것인데, 이를 온전히 이해하기도 전에 곧 사라질 운명에 처해 있다.
이 글은 '누군가의 기억 속에 살아 있을 을지로의 풍경들(2)- 을지유람 그리고 노가리 골목'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