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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민 Jul 23. 2023

영등포를 이해하기 위해 시작한 발걸음

도시공간은 무엇으로, 어떻게 구성되고 변화하는가

영등포를 관찰하다.

어찌하다 우연히 영등포 신길동에서 잠시 거주했던 경험이 이렇게 ‘영등포’라는 지역을 이해하고, 어떤 과정을 거쳐 도시화가 진행되었는지, 공간의 구성은 어떤 방식으로 변화되었는지를 살펴보게 될 수 있을지 예상하지 못했다. 늘 그랬던 것처럼 동네를 알아갈 차원에서 마구마구 돌아다녔는데 한국의 역사와 도시 서울과 영등포라는 지역의 변화를 전체적으로 살펴보게 되었다. 요즘 서울을 단순하게 ‘도시’라는 큰 개념으로만 파악할 것이 아니라 구로 나눠지는 지점을 ‘지역’으로 보고, 그 지역이 모여서 서울이 되는 개념으로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성북구에서 ‘성북학’이라고 지칭하는 개념을 쓰고 있는데, 이는 서울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구에 해당되는 것 같다는 확신을 영등포를 살펴보면서 하게 된다. 도시공간구성과 성격의 변화를 관찰함으로써 얻게 되는 지식과 정보를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연결시켜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을 이해하게 하는 ‘OO학’. 이런 지점을 나는 계속 영등포에 적용해보려 한다.

예전부터 지금까지 지속해서 보고 있는 영등포의 공간구성과 변화, 그 중심에 있었던 공장과 미군부대, 그리고 성매매 집결지에 대해 적어본다. (영등포는… 뭐라고 말로 표현하기 힘든 곳인데, 그럼에도 계속 지켜보게 된다.)


일본군과 미군이 주둔한 용산에 비해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영등포의 일본과 미군의 흔적 그리고 성매매 집결지에 대해


영등포의 적산가옥은 언제, 어떻게 사라졌나? 남아 있는 것인가?  

일본인 주 거주지였던 후암동, 갈월동, 남영동, 삼각지인근, 효창공원일대, 청파동에는 일본식 가옥 흔적이 곳곳에 아직 남아 있다. 영등포 또한 일본인들이 조성한 대표적인 공업지대로 일본인 거주 인구가 꽤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식 가옥의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왜일까? 영등포역 인근에 있었던 철도 사택은 모두 철거되어 사라졌고, 주택가에서 일본식 가옥으로 추정되는 건물 2채 정도를 발견했지만, 추정일 뿐 확실치 않으며, 영등포역 인근 쪽방촌과 철공소 일대에 의심되는 건물 몇 채 정도다. (문래동 영단주택을 제외하고)

1990년대에 발행된 <영등포 구지>에서는 영등포에 거주한 일본인 인구수를 언급하고, 다른 도시와 비교하며 거주밀도를 따져봤을 때 대표적인 일본인 시가지였음을 설명하고 있다.

[내용출처: 1990년대 발행된 영등포구지:

“영등포시가지 내 일본인은 212호 651인, 한인은 279호 971인, 합계 491호 1,622인이었다. 여기서 영등포시가지라 함은 오늘날의 영등포동을 말하며 이웃한 당산동이나 대방동은 포함되지 않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1,622명의 인구 중 일본인이 651명이었다는 것은 첫째 일본인의 규모에 있어 수원(634) 보다 많았다는 점, 둘째 일본인이 점하는 비율이 40.14%에 달하여 완전히 일본인 시가지를 형성하고 있었다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중략)  일본인 인구수가 전체의 20%만 넘으면 일본인 시가지나 다름없었으니 그중 대표적인 것으로 인천 41.5%, 대전 58.3%, 군산 46.7%, 부산 34.5% 등이 두드러진 일본인 시가지였는데, 영등포는 비록 인구 규모 자체는 크지 않았지만 일본인 거주밀도에 있어서는 역시 대표적인 일본인 시가지였음을 알 수가 있다.” <1991년 발행, 영등포 구지>

[출처: 예외공간으로서의 집결지의 공간변화 - 영등포 ‘집창촌’을 중심으로, 김희식]


영등포의 미군시설은 어느 정도 규모였나?

1950~1970년

미군부대도 마찬가지다. 해방 이후 20년간 미군부대와관련 부속 건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용산의 미군부대만큼 관심도가 높지 않다. 물론 규모나 기능면에서 용산이 훨씬 더 크고, 중요했겠지만, 도심부의 부족한 자원을 충족시키고, 미군 가족과 관련된 시설이 있었으며 사람들이 살았다. "방직과 맥주"라는 큰 범위의 공장지대의 성격에 가려져 있었을 뿐이었다.


미군정기 종연방적 : 캠프로버츠(Camp Robers) 주둔1947년 7월 미군정 방직공장운영부 운영 • 해체


캠프로버츠(Camp Robers)

1949년 주한 미국군사고문단과 미국 민간 근로자를 위한 가족주택단지로 설립, 육군 공병대의 가족주택, 1970년 폐쇄. 방림방적자리이자 현) 문래자이아파트

캠프스페이스(Camp Space)

일제강점기 민영휘의 아들 민규식이 운영했던 영보합명 부지 자리, 당산동 6가 337번지, 1957년 지어졌고 1970년 폐쇄.

캠프윌슨(Camp Wilson, 1,2)

가족주택, 크라운맥주공장자리 현) 영등포 푸르지오 아파트, 1971년 6월 영등포 떠나면서 주요 미군부대는 떠남.

캠프윌슨(II) : 동양방적 일부

캠프루이스(Camp Lewis)

캠프로버츠와 인접 위치, 캠프 로버츠의 사무실과 지원시설, 1970년 본국으로 돌아감.

캠프 블랙(Camp Black)

택지 중 하나, 영등포공원, OB맥주공장자리

캠프 베이커(Camp Baker)

미 8군 우유공장으로 출발, 1952년 -1985년 폐쇄, K-16으로 이전. 미 육군 전용 보급선을 이용하여 수도권 부대로 옮겨짐. 1960년대 중반 조선맥주 측 생산설비확장을 이유로 캠프 이전 요구, 캠프윌슨 내 주둔하고 있던 304 통신 부대를 왜관 캠프 캐롤로 이전 조건

Civilian

미국 육군 민간 인력지원단(U.S Army Civilian Human Resources Agency), 창고

캠프스페이스(Camp Space) 아래 Civilian

방적주식회사 공장, 미군 통신부대


1) 경기염직(현 영등포 유통상가) 공장에는 미군 부대와 국군이 함께 사용.

2) 서북청년회 1800여 명(포병 6개 대대) 모집 및 육군 야전포병단 창설

3) 경성방직 : 영국군 공병 중대 1951년 11월 28일까지 주둔

4) 캠프윌슨(II) Civilian: 55 미 공병단 주둔

5) 영중 초등학교 아래 영등포동 136~140번지, 146~147번지: 해방 전부터 다량의 철재 야적장->미군 주둔 후 유류부대 사용 -> 1955년 8월 이전

6) 동광차량: 인근에는 미군 중기폐차 부대

7) 문래공원: 제6군단 산하 영등포 포병사령부, 수도군 사령부 -> 1978년 제52보병사단 사단본부 인천으로 이전

8) 양평동: 소화제강소, 미군이 창고로 사용

9) 해방자호, 1947년 영등포역 3분간 정차

10) 영로선 개통

11) 미군위안부 비롯, 밀창이나 사창 운집,

12) 신길동 텍사스촌: 1950년대 미 10 보급부대 주둔, 신길3동 261번지

13) 용산기지 임시편제에서 상설편제로 전환 예고, 군인가족과 병사들을 위한 편의시설 제공 영등포기지 1970년대 거의 폐쇄


영등포 성매매 집결지는 결국.  

청량리와 미아리만큼의 대규모는 아니지만 1920년대쯤부터 등장한 유곽으로부터 출발하여 군부대 주둔으로 인해 확산/형성된 사창으로 영등포역, 철공소, 고가 아래, 철길인근, 쪽방촌 영등포 먹자골목.. 굉장히 넓은 범위에서 포진되어 있던 성매매업소들은 조금씩 철거되며 범위를 좁혀갔지만  현재까지도 성매매집결지는 남아 있다. 이는 최근에 영등포 인쇄소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옛날에는 밤 되면 어둡고 무서웠어. 도로가 2차선인데 차도 별로 안 다녔거든. 신호등도 없어요. 막 그냥 건너 다니는 거예요. 밤에 공장 끝나면 껌껌할 것 아니에요. 정문은 지금 경방필(타임스퀘어) 앞에 그쪽이 정문이고 여기까지가 담이니까. 끝에는 지금은 없지만 철길. 술집들, 막걸리 팔고 옛날에 기생들. 고급집이 아니라 그런 집들. 가운데 철길이고. 지금 도로가 철길이에요. 그 옆에는 다 술집. 옛날에는 막걸리 팔면서 노래 부르는데 그런 곳. 끝까지 그런 집이었습니다.”

1980년대 초 영등포 인쇄소로 일을 시작한 A 씨
영등포 일대에 지번이 부여된 건 80여 년 전 일제강점기 토지조사사업 때였다. 광복 후 지금까지 한 번도 토지 측량을 하지 않은 탓에 필지 주인을 찾기 어려웠다. 지번을 무시한 채 무분별하게 세워진 건물과 구조물도 많았다. 나 기자는 170여 개 필지(4,158.5㎡)의 등기부등본과 토지대장을 일일이 대조하면서 현장을 직접 조사했다. 그 결과 놀라운 사실이 드러났다. 영등포 성매매 집결지 170여 개 필지(4,158.5㎡) 가운데 국가 지분이 포함된 토지가 약 860㎡(공동소유 지분 포함)로 20.6%를 차지하고 있었다. 성매매를 처벌하고 근절시켜야 할 정부의 땅에서 수십 년 동안 불법 성매매가 이뤄진 것이다. 땅 주인인 기획재정부는 일부 토지에서 대부료까지 챙기고 있었다.
<내용출처: 단비뉴스, http://www.danbinews.com/news/articleViewAmp.html?idxno=22848>
[사진출처: 서울 영등포 성매매 집결지 현황. 출처 한국일보 ]

영등포 성매매집결지가 현재까지 남아있을 수 있었던 것에는 역사적 맥락과 더불어 토지• 건물 소유자를 비롯한 성매매집결지라는 장소에 관계된 복잡한 이해관계와 상황들이 어느 하나 해결되거나 나아진 것 없이 그 상태로 유지되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청량리, 미아리 일대와는 어떻게 다를까? 개발이 실행된 곳과 실행되지 못한 곳의 차이는 어떤 요소로 비롯되는 것일까? 기차역, 쪽방, 철공소, 고가, 공장.. 미군부대 등의 서로 다른 요소들이 연결되고 성매매 집결지가 도시에 형성됨으로써 나타나는 현상으로 도시를 이해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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