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당 글은 <저널서울>에 기고된 글입니다.
명동, 충무로, 후암동, 필동, 회현동, 광희동, 신당동. 과거 일본인들이 살았던 주거지다. 동네를 걷다 보면 오래된 옛 일식 주택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한, 두 채가 아니라 여러 채가 모여 있어 걷다 보면 마치 일본의 어느 마을에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 힘이 너무 강해서 ‘분위기에 압도당한다.’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일식 주택은 해방 이후 국가재산에 귀속되거나 개인에게 매각되었다. 매각된 집은 철거 후 신축하는 경우도 있고, 내부 공사를 하는 경우도 있다. 사용하면서 필요한 것을 채우거나 불필요한 것은 없애면서 부분 변형된다. 또, 내부 공사를 하더라도 외부 골조나 재료는 변형되지 않는 경우 본래 집이 품고 있던 분위기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세월이 흐르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변하는 과정에서 쌓이는 집의 시간을 탐색하다 보면 어느새 우리 삶과 얼마나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는지 살피게 된다.
영등포에도 꽤 많은 일본인이 살았다. 일본인들이 운영하는 대규모 공장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흔적은 지명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현재 문래동은 1930년대 방직공장이 들어서면서 마을이 형성되었고, 당시 사옥정이라 불렸다. 정은 일본식 행정구역 명칭이고 사옥은 방적공장을 뜻하는 일본식 한자말이다. 1949년에 행정구역 명칭을 동으로 바꾸면서 사옥동이 되었고, 1952년이 되어서야 문래동으로 변경되었다.
“한일합병 직후인 1910년 12월말일 현재로 조사한 「주요시가지현재호구」에 의하면 영등포시가지내 일본인은 212호 651인, 한인은 279호 971인, 합계 491호 1,622인이었다. 여기서 영등포시가지라 함은 오늘날의 영등포동을 말하며 이웃한 당산동이나 대방동은 포함되지 않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1,622명의 인구 중 일본인이 651명이었다는 것은 첫째 일본인의 규모에 있어 수원(634)보다 많았다는 점, 둘째 일본인이 점하는 비율이 40.14% 달하여 완전히 일본인 시가지를 형성하고 있었다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당시 예컨대 경성부의 경우 일본인의 수가 13.8%였으며, 평양이 16.7%, 대구가 20.8%였다. 그리하여 일본인 인구수가 전체의 20%만 넘으면 족히 일본인 시가지나 다름없었으니 그 중 대표적인 것으로 인천이 41.5%, 대전 58.3%, 용산 46.7%, 부산34.5% 등이 두드러진 일본인 시가지였는데, 영등포는 비록 인구규모 자체는 크지 않았지만 일본인 거주밀도에 있어서는 역시 대표적인 일본인 시가지였음을 알 수가 있다.” <영등포구지, 1991년 간행>
윗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영등포에는 수원보다 많은 일본인이 살면서 시가지를 형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흔적 찾기가 힘들다. 왜 그런 것일까? 굳이 일제 강점기 단서를 찾고자 하는 이유는 영등포의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시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경기 시흥군 북면 영등포리였던 지역이 1936년 일제의 경성부 구역 확장 과정에서 편입되었고, 1943년 ‘영등포구’라는 행정구역명을 최초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공업지대로 출발한 영등포는 1990년대 후반까지도 대규모 공장들이 남아 있었다. 이후 일부 공장들이 다른 도시로 이전한 뒤에도 규모가 축소되었을 뿐 여전히 공업지대로서 역할이 유지되고 있다. 대규모 공장이 있던 자리는 아파트, 공원, 신축 건물로 채워졌다. 변화는 한순간에 이루어졌고, 많은 것들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금이라도 얼마 남지 않은 단서들을 쫓아 일제강점기부터 이어지는 영등포 역사를 가까이하고 상상해 보고자 구석구석 살펴보았다.
철도역 인근에는 철도종사자들이 머물던 사택도 있었다. 모습은 위성사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미 사라져 버린 것을 붙잡고 아쉬워하면 무슨 소용인가 싶겠지만 포기하지 않고 찾다 보면 뭐라도 나올 것 같아 주변을 맴돌았다. 덕분에 한 고등학교 인근에서 일식 주택으로 추정되는 건물을 몇 채 발견할 수 있었다. 다만, 명확하게 증명할 수 있는 그렇다 할 근거가 될 만한 자료를 찾지 못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왜 이렇게 일제 강점기의 흔적을 남겨두지 않고 없애 버렸을까?’하는 질문이 계속 마음속에 맴돌았다.
그러던 중 우연히 어느 일본인이 온라인 플랫폼에 일기 형식으로 남긴 글과 사진을 발견했다.
“다카사고의 가네보 사택에서 태어나 고베 효고공장 사택에서 유치원을 다녔고, 경성 영등포 사원아파트에 살면서 영등포 국립학교에 입학했다. 쇼와16년 4월이었습니다. 이 직원 아파트는 웅장한 3층짜리 벽돌 건물이었습니다. 공장 부지에는 여러 개의 건물이 있었고 비슷한 노동자 아파트도 있었습니다. 서두의 사진에서 앞 건물은 내가 반년 동안 다녔던 유치원이었고, 뒤쪽 건물은 노동자 아파트였던 것 같다. 내가 들어간 영등포 국립학교는 목조 건물인데 바구니 아이들의 널빤지를 밟고 신발장에서 학교 건물로 올라갔던 것 같다. 담임 선생님은 둥근 얼굴의 연상의 남자 교사 야마다 선생님으로, 오르간 연주를 잘하는 모습에 감동했습니다. 한 학기 만에 1학년 여름방학에 미사카 국립학교에 전학. 영등포의 체류 기간이 1년도 채 되지 않았다는 의미다. 서울 올림픽이 열리기 전해였는지, 서울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영등포를 방문했다. 하지만 숙제를 하지 않은 탓에 예전에 살던 곳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1997년 여름, 직장을 그만두고 경성에 있는 우리 집의 옛 유적을 찾기 시작했다. 통역을 부탁해 영등포에 있던 옛 종연방적공장의 유적을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어르신을 찾아가 물어보니 의외로 공장 유적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뜻밖에도 옛날의 흔적을 꽤 많이 남겼습니다.”
[내용출처: 재조 일본인의 회상, 「종방 영등포 공장」 터 , https://zrr.kr/Cjrf]
이 글의 주인공이 사원 아파트에 살면서 영등포 국립학교에 다녔는데, 기간이 1년도 채 되지 않았다는 것과 서울 올림픽이 열리기 전해에 방문했는데 스스로 찾지 못해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그 결과 옛 종연방적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1998년쯤에 종연 방직이 사라졌기 때문에 방문 당시에는 공장이 있었을 것이다.
사원 아파트에 살던 일본인이 흔적을 찾아 다시 영등포를 찾아왔다는 것이 생경하면서도 관계된 사람들이 과거를 쫓는 과정을 보는 것 또한 과거 영등포를 이해하는 단서라는 생각을 잠깐 하게 되었다. 글에 등장하는 영등포 국립학교는 1905년 4월 일본인 학교인 영등포 심상 고등소학교로 시작했고, 광복 후 1945년 11월 재개교하면서 영등포 초등학교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단서라는 것이 물리적 공간이어야만 하는 건 아닐 테다. 과거와 현재의 연속성을 이어가는 과정에 있는 사람, 과거를 찾아나가는 행위도 단서에 포함될 수 있다.
한편으론, 일제강점기 이후 일본인이 떠난 자리를 미군들이 잠시 채우기도 했다. <예외 공간으로서의 집결지의 공간 변화-영등포 ‘집창촌’을 중심으로, 김희식> 논문 내용에 의하면, 영등포에 있던 미군 관련 시설은 가족 주택단지, 사무실과 지원시설, 우유공장, 육군 민간 인력지원단, 통신부대 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서울 도심에 있는 미군 기지와는 다르게 대부분 사택이거나 지원시설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미 육군 극동 지도국에서 발행한 1950년대 중반 서울시가 지도를 보면 시설의 위치가 표기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때 사라진 흔적 찾기를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과거는 절대 동시다발적으로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현재의 시간에 존재하는 것 같다가도 샛길로 잠시 빠지면 순간 이동한 것처럼 과거로 돌아가곤 한다. 여러모로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발견되기도 하고, 잠시 다른 곳에 시선을 두고 있으면 어느새 사라져 버리기도 한다. 이러한 특징을 염두에 두고 찾다 보면 어딘가에서 흔적은 늘 발견된다. 그렇게 영등포를 돌아다니며 자료를 뒤적였다. 최근에는 서울 도시 공간 권역별(서남권) 기록화 보고서를 뒤적이다 영등포역 인근 철도 사택과 군인 사택 건물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없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발견되는 단서들을 찾아낼 때마다 생각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의 시간은 불규칙적이고, 과거와 현재의 연속성을 찾아내는 일은 다사다난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발견되는 찰나의 순간들은 꽤 감격스러우면서도 갑작스럽게 툭툭 튀어나와 시간이 뒤죽박죽이다. 마치 울퉁불퉁한 길을 걷는 것 같은 기분이다. 그럼에도 현실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도시사를 보면 밋밋하기 그지없다. 무언가 단절되고, 솎아내고, 가지치기 당하면서 사라지는 것들이 얼마나 많을지 감히 짐작해 본다. 그럴 때마다 더 늦기 전에 곳곳에 숨겨져 있거나 발견되기를 기다리는 무언가의 흔적을 찾아, 나는 오늘도, 내일도, 영등포를 걷는다.
[원문보기: https://www.journalseoul.com/news/articleView.html?idxno=3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