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당 글은 저널서울에 기고된 글입니다.
이경민 / 서울수집 운영자(instagrm@seoul_soozip)
재개발의 경계에서 보광동을 기록하는 남선희 배우의 이야기(1)
재개발의 그늘 속에서 살아남은 이야기들,
그리고 연극을 통해 기록된 보광동의 풍경과 사람들
1930년 용산 6가의 둔지미 마을 주민, 1940년 북한 주민, 6·25전쟁 이후 피난민·상이용사·전재민·농촌지역 이주민이 정착·형성된 동네이자 타국의 문화 섞임이 자연스러운 곳이 있다. 서울시 용산구 보광동이자 한남3구역이다. 재개발 사업 진행을 위해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모두 어딘가로 떠났다. 서울 도심부로 향하는 한강 변, 산등성이의 빽빽한 주택들과 우뚝 솟은 교회는 보광동을 상징하는 대표적 풍경이었다. 이 풍경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는 구불구불하게 굽이친 골목이 연결된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야 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마다 가던 길을 멈추고 되돌아갈지를 망설인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끝까지 오르면 멋진 풍경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앞을 향해 내디뎠다. 재개발이 진행된 이후에도 계속 이 풍경을 계속 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자리엔 빈집만 남았다. 다들 어디로 갔을까?
오랜 세월 삶터로써의 존재했던 보광동의 의미를 되새기고, 동네 구석구석 골목을 뛰어다니며 발견한 것들을 사람들과 함께 공유한 사람이 있다. <프로젝트 여기에서 저기로>라는 개인 창작 프로젝트에서 동료들과 사라지는 공간과 사람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연극을 만드는 남선희 배우다. 재개발로 골 사라질 보광동을 4년간 리서치하고 연극<한남 제3구역> 공유회 일환으로 <월간 연극>을 진행했다. 변화를 맞이한 보광동의 이야기를 주민이면서 연출가로서 어떠한 생각과 방식으로 풀어나갔는지 궁금해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Q. 한남3구역을 대상으로 <월간연극>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요?
2019년에 보광동으로 이사 했어요. 재개발 사업이 확정되지 않았을 때고, 이미 20년 동안 ‘재개발하려면 10년 걸린다.’는 말을 하고 있어서, ‘안될 거야.’라고 할 때 간 거죠. 명절 때 건설사들이 수주 경쟁을 벌이면서 플랜카드를 걸어놨는데, ‘지주 및 건물주님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문구를 써놨더라고요. 그걸 보니 기분이 좋지 않았어요. ‘난 지주도, 건물주도 아닌데 그러면 나는 복 받지 말라는 소리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재개발 논의 대상은 결국, 땅 주인과 건설사지 살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이 명확하게 보였어요. 이걸로 ‘작품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보광동은 2016년? 2017년? 쯤 우사단 길 핫하다고 놀러 와서 알게 되었어요. 그때 ‘여기 골목 장난 아니다. 근데 또 뷰도 엄청나다.’라는 기억을 가지고 있었는데, 살면서 보니 너무 독특하고 재미있는 공간인 거예요. ‘젠더, 인종 상관없이 모든 걸 넘어 한 공간에서 같이 산다.’는 것이 흥미로웠어요. 연극으로 만들 만한 가치가 있겠다고 판단했습니다. 2020년에는 ‘연극으로 만들고 싶어.’라고 생각했고, 2021년에는 서울문화재단 사업에 지원했는데, 선정됐어요.
연극을 할 때 제일 피하고 싶었던 것 중 하나가 관객이 우르르 오면 전시장처럼 돼버리잖아요. 재개발이 확정된 건 아니었지만, 어떤 공간에 누가 와서 막 보는 게 그렇게 바람직한 것 같지 않은 것 같아서 온라인 줌 생중계 공연하는 것으로 결정했어요. 생중계로 골목을 뛰어다니면서 담은 인터뷰 내용으로 작가와 이야기를 만들었어요. 이 내용을 발전시켜 극장 버전으로 바꾼 것이 두산 아트 랩이고요. 작업 하면서도 엄청나게 큰 물음표로 다가왔던 지점이 있었습니다. 사람을 많이 만나지 않아도 인터뷰하다 보면 사적인 이야기가 계속 나오잖아요. ‘내가 그것을 취사선택한다는 것이 윤리적으로 문제 있지 않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연극 시작할 때 인터뷰 내용을 다루는 것에 대해 논의하다 싸우는 얘기로 시작해서 결국 ‘저’의 이야기로 풀게 되었어요. 두산 아트 랩 공연이후 호평도 많이 받았지만, 리뷰에 ‘나는 그 동네에서 일어나는 비극을 알고 싶었는데 왜 니들끼리 싸우는 얘기를 해주냐.’는 말도 있었어요. 그 말이 개인적으로는 불쾌했어요. ‘재개발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비극을 보고 싶다.’라는 말이 ‘관객이 원하는 건 이 안에서 안 좋은 이야기나 집주인한테 쫓겨난 이야기가 듣고 싶은 건가?’하고 약간 삐뚤어지게 들었던 것 같아요.
이 작업이 저한테 특별하고, 더 소중하게 변했던 건 결국 보광동에서 제가 살고 있기 때문이었죠. 안 살면서 작업을 했으면 이렇게까지 깊이 생각 안 했을 것 같아요. 친구들과 싸웠던 얘기들 2021년, 2022년에 했던 초반 작업에 들어갔었거든요. 친구들은 작업하고 돌아가지만 저는 여기에 살아요. 인터뷰 내용을 편집해서 작품에 사용한 뒤 당사자 집을 계속 지나가야 하니까 ‘이 작업은 잘못됐구나.’하는 마음이 들었어요. 물론 ‘그렇지 않다.’고 친구들과 엄청나게 싸웠어요. ‘우리 그렇게 쓰진 않았잖아. 그러니까 괜찮아.’라고 하는데, 저는 계속 그 사람 집 앞을 지나서 집으로 오니까 ‘방법을 바꿔야겠다.’라고 생각하고, 월간 연극을 시작한 거였어요.
Q. 재개발 하는 동네는 많은데, 그 중에서도 보광동으로 이사 오게 된 이유는요?
제일 싸서요. 지인이 월세가 저렴한 셰어하우스가 있다고 알려줬었어요. 생활비가 많이 드는 상황에서 괜찮은 가격이었어요. 하지만, 이사 오는 날에는 울었습니다. 차가 못 들어가는 동네는 처음 살아봤고 셰어하우스라 방 하나만 제 것으로 사용할 수 있었어요. 침대(라꾸라꾸)와 행거를 놓고 나니 공간이 아예 없는 거예요. 그럼에도 연극을 하면서 살 수 있는 유일한 곳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왜 연극을 해서 이렇게 가난하게 살까’하는 마음 상태로 갔죠.
Q. <월간연극>은 어떻게 진행되었나요?
‘매달 발견한 것들을 가볍게 공유하는 자리를 가지자.’는 생각이었어요. 공연은 시간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그때만 반짝하게 되거든요. 그 기간에 마주한 것만 이야기가 되는 거예요. 매달 돌아다니면서 매번 새롭게 발견하는 것들이 많았고, 의무적으로 관객을 만났어요.
이렇게 2명만 와도 ‘내가 이걸 발견했어요.’라고 얘기해도 되지만, 저도 그렇고 친구들도 너무 열심히 하다 보니 자꾸 공연 포맷으로 나오더라고요. 연말쯤 됐을 때는 피로가 어마어마하게 쌓여서 ‘너무 욕심냈구나.’라고 생각했어요. ‘힘이 들어갔다.’는 얘기를 했음에도 계속 새로운 것들이 발견되는 거예요. 어린이집 폐원하는 것, 짐 빼는 사람들, 외국인들 모여 있는 모습들을 보고, 가볍게 잡담하면서 어떻게 지내는지 묻기도 하고요.
어르신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창작자로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지점이 생기기도 했어요. 70대로 보이는 한 어르신이 ‘그냥 평범한 삶을 잘 살아온 우리한테는 관심이 별로 없고, 어떤 대상을 찾고 다니는 것 같다.’는 말을 해주셨거든요. 이 말이 계속 마음에 찔리고 많은 생각을 하게 했어요. 그러면서 외국인뿐만 아니라 보광동에서 사신 분들의 얘기들을 듣고 그것을 잘 공유하는 것으로 목표가 바뀌었던 것 같아요.
Q. 매달 주제를 정하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어떤 깨달음이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좀 보자.’ 하는 것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어린이집 퇴거할 때도 선생님들이 일터였던 공간을 비워내는 이삿날이었거든요. 그때 많은 감정을 느꼈어요. ‘이게 단순한 것이 아니구나. 일과 삶 터전이 사라지는 거구나. 그런 공간에 내가 있구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표정을 보고, 내가 다 목도하고 있구나. 이것들을 연극으로 담는다는 게 뭘까?’라는 생각을 했죠.
Q. 마지막 <월간연극>에 등장했던 ‘냉장고’도 그런 의미였을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사람들이 빠져나감과 동시에 쓰레기가 어마어마하게 나오고, 그중에서도 냉장고를 많이 버리고 갔어요. ‘냉장고를 이렇게 버리고 가냐. 진짜 너무한다.’라고 분노했다가 냉장고가 음식을 보관하는 거잖아요. 한남 제3구역이, 보광동, 한남동, 이태원동 자체가 냉장고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낡은 냉장고 한 대가 ‘이슬람 문화권 사람들, 젠더 사람들 나 같은 예술가들, 아주 오래전부터 살았던 이북에서 내려오셨던 분들, 할머니, 할아버지분들을 썩지 않게 같이 잘 보관했구나.’하고요. 동시에 ‘냉장고가 버려지는 것처럼 한국 사회에 이런 공간이 버려지는구나.’라는 생각이 좀 들었어요.
자본주의 논리로는 바꿔야죠. 제가 개발자고, 지주면 당연하다고 생각할 거예요. 근데 사회학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봤을 때 진짜 독특하고, 어울려서 사는 것은 드문 일이잖아요. ‘이 공간이 없어지는 건 진짜 무서운 거구나. 부자들은 부자들만 살고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끼리만 살고 그럼 젠더가 독특한 사람들은 또 어디로 가나?’ 이런 부분에 대한 것을 꼬집고 싶었던 거예요.
Q. 깊은 의미가 있었네요. 또 인상 깊었던 것은 동네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자르는 모습을 담아낸 것인데요. 어떻게 진행할 수 있었나요?
그냥 했어요. 동네 돌아다닐 때 인사하면서 사장님께 ‘연극 하는 사람인데, 오랫동안 이발소 한 것 담고 싶은데 해도 되는지’ 여쭤봤어요. 흔쾌히 하라고 하시더라고요. 주민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아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외지인한테 그러기 어렵잖아요. 외국인들은 제가 돌아다니는 애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어떤 분은 싫어하기도 했고요. 돌아다니면서 사진 찍어도 되냐고 물어보니까 뭔가를 밝혀내러 다니는 것 같잖아요.
이슬람 문화는 한국보다 훨씬 더 보수적이어서 자신의 아이들이라든가 아내한테 관심을 두는 게 주민이라도 불쾌한 거예요. 그분이 저한테 그랬거든요. ‘내가 너 돌아다니면서 사진 찍는 거 많이 봤는데 네가 힘들 때 물 한 잔은 줄 수 있지만 우리 가족을 찍거나 기록하는 건 싫다.’고요. 저도 ‘알겠다. 미안하다. 일부러 의도한 건 아니고, 연극을 하는 사람인데, 궁금해서 그렇다.’라고 말해줬어요. 이후부터는 조심하는 거죠.
Q. 그런 측면에서는 외부인과 비슷한 입장이 되는 것 같기도 하네요.
장·단점이 명확한 것 같아요. 내부에 있으니까 ‘이 이야기는 담지 말자, 이거는 하자.’라고 정하는 부분에서 한계가 좀 있어요. 저한테도 터전이잖아요. 처음에 친구들 막 불렀을 때만 해도 ‘여기 진짜 재개발해야겠다.’는 말에 동의했거든요. 근데 그 말은 결국, ‘지금 내가 사는 터전이 사라져야 한다.’라는 의미와 다름없는 거잖아요. 내가 살 곳은 여기밖에 없는데 ‘재개발해야 한다.’는 말이 어떻게 보면 큰 공포로 다가와요. 당연하다는 걸 인지하고 있지만 막상 그 말을 들으면 쉽지 않은 거고요.
‘어떤 이야기를 담지 말자.’의 기준이 높아지고, ‘가난 포르노가 되지 않게 하자.’라고 하지만 사실 가난해요. 부자도 많은데 가난한 사람이 많은 것도 사실이에요. 최대한 이런 부분을 어떻게 안 드러낼 수 있을지를 고민하다 보니 결국 ‘나’를 드러내는 게 제일 낫겠다는 결론이 나더라고요. 나를 드러내되, 마지막 공연에 등장했던 냉장고 같은 물건에 하나씩 살포시 끼워 넣는 거예요. 돌아가신 할아버지 이야기, 이주민 아이들 이야기를 깊게 가져가지는 않되, 조금 더 거리감이 생기면 재창작할 수 있는 요소가 생길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남선희 배우의 이야기는 2부로 이어집니다.
피플 앤 더 시티(People and the City)
살면서 우리는 각자 살고 있는 도시를 가깝게 마주할 기회가 얼마나 있을까요? 먹고 사는 일이 바쁜 현실 속에서 마음을 쓰고 들여다본다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먹고 사는 일’ 안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행위가 우리의 삶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아시나요?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지나쳤던 것들이 나의 이웃과 나의 삶에 작은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데도 계속 무관심할 수 있을까요? 여기, 자신이 발 딛고 살아가는 ‘터’에서 어떠한 지점으로부터 삶이 연결되는지를 깨닫고 도시를 마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도 처음부터 알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겠지요. 다만, 그 깨달음을 자신의 삶으로 보여주고, 도시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현상과 이슈를 더 이상 모른척 하지 않습니다. 각자가 살고 있는 동네에서, 지역에서, 그리고 도시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목소리를 냅니다. 이들이 마주하고 있는 현실의 삶 속에서 도시와 개인의 삶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발견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