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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민 Dec 05. 2019

하늘공원에 숨겨진 비밀_쓰레기섬 난지도

"쓰레기 버리지 마세요"

나는 '쓰레기 버리는 것'에 민감한 편이다. 주변에 쓰레기통이 보이지 않으면 외투 주머니나 가방에 넣어 두었다가 보이면 버린다. 요즘엔 거리에서 휴지통 찾기가 어렵다 보니 종종 집에 가져올 때도 있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는 '과한 거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도 있겠지만, 이러한 행동이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건 혼자만의 착각이었던 것 같다. 모두가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거리낌 없이 거리에 쓰레기를 버렸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마주 오고 있던 사람이 커피가 담긴 테이크 아웃 잔을 들고 있었다. 지하상가에서 지상으로 올라오는 중이었다. 주변을 잠깐 두리번거리더니 그대로 앉아 바닥에 테이크 아웃 잔을 두고 유유히 사라졌다. 처음엔 잘못 본 줄 알았다. 하지만 떠나간 빈자리에 덩그러니 놓인 쓰레기가 현실임을 깨닫게 했다. 이처럼 길거리에, 버스정류장 바닥, 건물과 건물 사이, 지하철 탑승구 옆, 버스 창틀에 까지. 버릴 수 있다면 모든 곳에 버려진 쓰레기를 목격했고, <쓰레기를 버리지 말라>는 경고문도 수도 없이 봤다. 이건 비단 나뿐만이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쓰레기를 마구잡이로 버리고 있다는 증거다. 쓰레기를 발생시킨 건 자신인데 처리하는 책임을 왜 남에게 떠넘기는 것일까? 정해진 장소에 버려달라고 하는 요청을 왜 지키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치우는 사람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버려진 쓰레기는 어디로 갈까?"

봉천동에 거주할 때였다. 봉천동은 경사가 심한 고갯길이거나 가파른 계단이 많은 동네다. 평평한 길이 거의 없는 편이라 수거해 갈 때도 당연히 차량으로 이동하면서 수거해 갈 것이라 예상했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쓰레기를 수거하는 아저씨들은 오전에 한번, 오후에 한번 등장했다. 나는 대부분 오후 시간대에 쓰레기 수거 아저씨들과 종종 마주쳤는데, 집마다 내놓은 쓰레기를 수거하기 편하게 정리하고 음식물 쓰레기는 따로 준비한 봉지에 넣고 수레에 담아 끌고 다녔다. 이때 아저씨들의 복장은 평소 우리가 알고 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활동하기 편한 티셔츠에 몸빼바지를 입고 있었다. 지정된 장소에 버리긴 했어도 마구잡이로 쌓여 있는 쓰레기를 정리하고 오르막길을 오르며 음식물 쓰레기를 수거, 이동한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이러한 장면을 자주 목격했음에도 수거 이후의 과정에 대해서 궁금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우리가 버린 쓰레기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지금으로부터 41년 전,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넘쳐나는 쓰레기를 무려 15년 동안 받아 내던 곳이 있었다.

한강 지류인 모래내와 홍제천, 불광천이 합류하는 저지대에 흙모래가 쌓여 만들어진 섬, 난지도. 난초와 지초가 자라는 섬이라 난지도라고 이름 붙여졌다. 홍수가 날 때마다 모래가 쓸려 섬의 모양이 바뀌고 물이 넘쳐 피해를 입었다. 배추, 무, 땅콩, 개구리참외를 재배를 했는데 땅콩의 경우 전국 생산량의 30%를 차지할 정도였고, 개구리참외는 맛도 좋고 굵었다. 철 따라 온갖 꽃이 만발해 '꽃섬'이라고도 불리었던, 난지도. 이곳은 바로 현재 우리가 '하늘공원'이라고 알고 있는 그곳이다. 이런 난지도의 운명이 바뀌게 된 것은 1978년이었다.


"쓰레기섬이 되었습니다"

나날이 성장하는 경제와 인구집중과 더불어 생활쓰레기와 산업쓰레기도 함께 늘어만 갔다. 초기에는 쓰레기를 처리하는 폐기물 처리장이 없어 택지 조성지나 저습지에 매립을 하였으나, 점점 늘어나는 쓰레기를 감당할 수 없어 대규모 매립장을 찾던 중 서울시 외곽이면서 교통이 편리한 난지도를 매립지로 선정하게 된다. 하지만 매립방식이나 관리 차원에서 철저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위생적으로도, 환경적으로도 무방비 상태였다. 쓰레기 분해 작용에 의해 발생하는 메탄가스로 인해 가스불이 지속적으로 생겼고, 이로 인해 늘 화재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1990년대 초반, 성산동과 망원동의 여름은 평범하지 않았다. 봄이 지나고 초여름만 돼도 거리에 마치 새떼처럼 날아다니는 것이 있었다. 눈이 닿는 모든 곳을 점령한 그것은 다름 아닌 '파리'였다. 초파리, 쇠파리, 금파리, 왕파리 등 정말이지 온갖 종류의 파리를 어린 시절부터 보고 자랐다. 아마도 난지도에서 날아왔을 것이다. p69 - 70  

하지만 거기에도 사람이 살았다. 내가 다닌 학교에는 상암동에서 온 아이들도 일부 있었다. 굳이 어디 사느냐고 물어보지 않아도 그들이 동의 경계를 넘어왔음을 알 수 있었다. 입은 옷이, 싸오는 반찬이, 그들을 대하는 일부 교사의 태도가 조금씩 달랐다. 난지도에 가면 안 된다는 훈화를 들으며 그들이 느꼈을 자괴감을, 나는 잘 상상할 수 없다. 난지도는 '산'이면서 하나의 '섬'이었다. 격리하고 배제해야 할 도시의 무인도 같았다. p74  <아무튼 망원동, 김민섭>
<1986년 7월 13일, 경향신문 제공, 난지도 쓰레기 처리 작업장. 출처:오픈 아카이브>

"난지도엔 사람이 있었다"

쓰레기섬이 되기 이전 난지도에서 활동하던 사람들 <모로리·귀리 마을 토박이>
<기사출처: 2005년 2월 15일 자, 한겨레. 환경운동연합 사이트에서 퍼옴:http://kfem.or.kr/>
난지도로 가는 나루터
“샛강에 물이 들면 단 한 척뿐인 큰 나룻배를 타고 난지도로 건너갔지. 뱃삯도 참 공평하게 받았어. 난지도 안에서 농사를 많이 짓는 순서대로 5 가마, 3 가마, 2 가마, 1 가마….” 난지도 샛강 건너 모로리에서 3대를 살았던 최선행(61)씨는 쓰레기가 쌓이기 전인 1977년까지 난지도는 ‘난초와 영지가 자라던 섬’이었다며 옛 기억을 떠올렸다... (중략)

최 씨는 “쓰레기 매립장이라는 최근 이미지와는 달리 예전에는 기름진 땅 덕분에 주민들이 풍족한 삶을 살았다”라고 말했다. 난지도에서 주로 활동했던 사람들은 샛강 건너편 모로리와 귀리 마을에 살았던 250여 가구였다. 이들은 낮이면 난지도로 건너와 땅콩·수수 농사를 짓고 소를 놓아 풀을 먹였으며, 저녁이면 다시 소와 수레를 끌고 집으로 돌아갔다.

우리나라 수수 빗자루의 7할, 땅콩의 3할이 난지도에서 난다던 시절이었다. 아름답고 풍족했던 난지도는 77년 정부가 한강변을 따라 난지도에 둑을 쌓고 78년 쓰레기매립장으로 지정하면서 천지개벽의 변화를 겪어야 했다. 박정희 정부는 잠실과 상계동, 구의동 등 소규모 쓰레기 매립지였던 곳이 아파트 단지로 개발되자, 교통이 편리하면서도 서울 외곽이던 난지도에 눈을 돌렸다. 수도권 중심 산업화 정책으로 55년 156만 명이던 서울시 인구가 78년 782만 명으로 5배 이상 늘어난 데 따른 결과였다.

난지도 땅은 서울시에 의해 1평당 6천~8천 원에 강제 수용됐고 모로리·귀리 마을 토박이도, 뜨내기도 모두 농토를 잃고 이웃 상암동이나 다른 지역으로 떠났다.  

<내용 출처: http://legacy.www.hani.co.kr/section-005100007/2005/02/005100007200502141810154.html >
쓰레기섬이 된 이후에 활동한 사람들
1980년대 난지도 생활 나도은 씨“10년 넘게 쓰레기로 먹고살았지만, 좀처럼 여길 떠날 수가 없더라고. 난지도는 내 고향이나 다름없어.”‘넝마주이’ 나도은(55·마포구 상암동)씨는 난지도를 ‘고향’이라고 했다. 충남 서산에서 사업에 실패한 뒤 가족을 이끌고 ‘돈벌이’가 된다던 서울 난지도로 흘러든 것은 1980년 3월이었다. 매섭던 꽃샘추위에 하얗게 일어나던 쓰레기 먼지가 아직도 눈에 삼삼하다고 그는 말했다... (중략) 그가 난지도에 입성했을 때는 너덜너덜 해진 옷을 몇 겹이나 껴입고 얼굴에 때가 끼어서 알아보기도 힘든 넝마주이들이 이미 200여 명이나 들어와 살고 있었다. 온종일 쓰레기 더미 사이를 헤매며 병이며 고철, 알루미늄 깡통을 주워 생계를 잇던 사람들 틈에서 나 씨도 생활 기반을 잡아야 했다. 남들은 넝마주이라고 비웃겠지만, 난지도에선 쓰레기 줍는 영역이 엄청난 ‘이권’이야. 쓸 만한 물건이 많이 섞여 있는 명동 같은 지역의 쓰레기를 받으려면 그때 돈으로도 200만~300만 원의 웃돈은 족히 줘야 했으니까.” 이렇듯 쓰레기를 거둬온 곳에 따라 난지도 안에서도 구역이 달랐다. 넝마주이들은 미리 계약된 자기 지역에 가서 쓰레기를 받은 뒤, 다음번 쓰레기 차가 들어오기 전까지 재빨리 쓸 만한 물건을 건져내는 일을 마쳐야 했다.

 <내용 출처: 한겨레, 2005년 2월 14일 자. http://www.hani.co.kr/arti/society/environment/10729.html#csidx9dccd2a79e4345ab67ff75dcc049e30  >

난지도가 쓰레기 매립지로 지정되기 이전에도, 이후에도 사람이 있었고, 살았다. 농사를 짓다가, 돈벌이가 된다고 해서, 각지각색의 이유로 사람들이 난지도에 몰려들게 되면서 쓰레기를 줍는 데에도 순서가 있었다. 이에 따라 이권도 달라졌다. 일명 '앞 벌이', '뒷벌이'가 존재했다. 쓰레기차가 들어오면 앞서서 돈이 될만한 것들을 '앞 벌이'들이 줍고 난 이후에 남은 것들 사이에서 '뒷벌이'들이 고른다. 앞 벌이가 되기 위해서는 권리금도 필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생존의 현장이었기 때문에 난지도로 모여든 사람만 해도 2~3천 명 정도였다고 한다.   


#난지도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난지도에는 쓰레기에서 발생하는 메탄가스로 인해 빈번하게 화재가 일어났다. 불을 잡으려고 물을 뿌려도 잘 꺼지지 않았고, 모래를 가져와 덮어야 겨우 잠잠해졌다. 이때 발생한 연기는 상암동과 성산동을 비롯한 인근 동네로 펴져 주민들의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1984년에는 화재로 인해 주민들이 살던 가건물이 모두 전소하면서 서울시에서 제공한 3~4평짜리 조립식 주택에 950여 세대가 무상 입주했다. 한편 잦은 화재와 한강에 유입되는 침출수로 심각한 환경오염이 진행되는 등 상황이 심각해지고, 쓰레기 매립이 포화상태에 이르자 1991년, 이번엔 김포에 쓰레기 매립지를 조성하게 된다. 이로써 난지도의 쓰레기 반입은 중단되었고 1993년에는 완전 폐쇄, 마침내 흙을 쌓는 복토 사업이 진행되었다.

1996년 난지도에서 발생한 화재, 사진출처: 오픈 아카이브.
<조립식 주택 위치도, 사진출처: 특집 다큐멘터리 난지도, 꽃섬 누가 버렸나>
▶ 서울시는 인근에 3~4평짜리 조립식 주택을 지어 950여 세대를 무상 입주시킴. 당시, 난지도 매립장 조립식 주택에는 824가구 3,103명이 살고 있었으며 그중 생활보호 대상자는 57가구 141명에 달함. 1993년 3월 말 매립장이 폐쇄되면서 주민 800여 가구 중 절반은 떠났고 남은 주민들은 철골 조립구조로 임시숙소에서 거주. 이들 조립주택의 지붕과 벽체는 심하게 부식되었고 집중호우로 매립장 제방이 붕괴될 경우 대형 재해가 우려되었으나 이곳 주민들은 난지도 조립식 주택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 막노동과 행상 등으로 생활.

▶ 서울시는 이들에게 취업알선 및 취로사업에 투입시키는 등 일자리를 마련해주고 임대- 분양아파트 입주권과 이주비 지급 등 이주대책을 세우고 철거에 들어갔으며, 조립식 주택단지 주변을 생활터전으로 삼고 있던 61개 폐품 수집소 종사자 400여 명은 시화 공업단지에 입주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제2매립장 후면 1만 5,200여 평을 점유하고 있던 골재상 3개 업체도 이전하도록 함.


1. 서울정책 아카이브 <난지도 생태공원 조성사업> 내용 중 일부 발췌.
2. 사이트 주소:  https://seoulsolution.kr/ko/node/741

매립이 중단되면서 1992년부터 2년에 걸쳐 주민 보상이 이뤄졌다. 위의 내용에 따르면 아파트 분양권이 지급되었고 시화 공업단지 입주를 유도한 것을 비롯하여, 서울, 안양, 경기도로 이주하게 되었다. 서울시의 의도대로 이들은 임대-분양아파트로 잘 이주하였을까? 폐품 수집소 종사자들은 시화 공업단지에 잘 입주하였을까? 모두가 해당되는 건 아니었을 것 같은데, 그럼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아니나 다를까. 아래 자료를 보면 난지도 매립지 폐쇄 이후 3년이 지난 1996년까지도 주민들의 이주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서울시와 지속적으로 협상해왔음을 알 수 있었다.

< 노 이즈스 카벤저: 보이지 않는 역사 공간 흔들기, 김정혜 작가 전시 자료 중 일부 사진 캡처>

#난지도, 공원이 되다.

쓰레기는 더 이상 반입되지 않았지만, 오염된 환경은 그대로였다. 난지도의 이후 활용방안에 대해 의견이 오고 갔다. 그중에서 대표적이 두 가지를 소개하자면, <조기 개발론>과 <안정화 장기 개발론>이 있다. <조기 개발론>은 쓰레기를 파내서 새로 조성된 해안 매립지로 옮기고 택지나 업무지구로 개발하자는 것이고, <안정화 장기 개발론>은 오염방지시설과 안정화 시설을 설치하고 공원을 조성, 시민 휴식공간으로 활용하면서 개발여건이 성숙되었을 때 개발하자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서울시는 후자를 선택했다. 쓰레기산 난지도를 시민공원으로 만들기 위해 오염된 물을 정화하고, 매립지의 안정화시키기 위한 설계에 들어갔다. 침출수가 한강과 주변 토양을 더 이상 오염시키지 못하게 난지도 산 둘레를 따라 콘크리트와 철판 차수벽을 둘렀고, 상부에는 빗물이 스며들지 못하게 폴리에틸렌 차단막을 깔았다. 중금속 등의 오염원을 제거하는 침술수 처리장을 조성하고, 메탄가스를 뽑아내는 장치가 설치, 에너지로 변환시키는 지역냉난방 시설도 건설하였다. 현재 여기서 발생하는 에너지는 월드컵 경기장과 상암동의 냉난방에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단계별 과정들이 하나하나 진행되었다고 생각하니 아름다웠던 섬을 애초에 쓰레기산으로 만들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왜 굳이 쓰레기섬을 만들었다가 다시 되살린답시고 이리 복잡한 단계를 거쳐 이러고 있는 것인지 안타깝기만 하다. 과거를 곱씹을수록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지금이라도 회복시킨 게 천만다행이라 생각한다. 이쯤 되니 발길이 저절로 난지도로 향했다.


#현재의 하늘공원을 통해 과거의 난지도를 바라보다.

현재 하늘공원이라 불리는 난지도에 도착했을 때 생각했던 것보다 높고 거대한 모습에 깜짝 놀랐다. 왜 굳이 쓰레기 '산'이라고 불렀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난지도 상부로 올라가기 위해선 수많은 계단을 밟아야 했다. 예전에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어떻게 이동했을까? 외부 사람들은 모르는 그들만이 이용했던 지름길이 존재했을지도. 계단을 오르며 바라본 풍경들은 과거 이곳이 어떤 지역이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변해 있었다. 난지도는 상암동과 성산동에 걸쳐 위치해 있었고, 상암동 주민들은 농사를 하며 살아갔다. 쓰레기 매립장으로 바뀌면서 가장 큰 피해를 봤던 동네라고도 할 수 있다. (그 당시 상암동은 개발이 장기간 지연되었던 도시 속의 농촌지역이었다.)

<성산동 풍경>
<상암동 풍경>
<같은 위치는 아니지만, 옛 상암동 풍경>

주말인 데다가 날씨가 좋아서 그런지 생각 외로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외국인도 은근히 있었는데, 아마도 사진 찍기 좋은 갈대밭이 있어서 그렇지 않을까 예상해본다. 이들 중에서 과거 난지도를 기억하고, 현재의 하늘공원 의미를 알고 있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거대한 연기를 내뿜으며 하늘 높이 솟아 있는 굴뚝의 정체는 무엇인지, 왜 하필 난지도 근처에 있는 것인지 궁금해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깨끗하게 정리된 산책로 곳곳에, 갈대밭 사이사이로 보이는 <매립가스 포집시설>은 왜 있는 것일까?

매립가스를 모으고 이송하는 시설은 곳곳에 분포되어 있어서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보면 금방 눈에 띄었다.

드넓게 펼쳐진 갈대밭 사이로 솟은 굴뚝은 쓰레기를 소각하고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마포 자원회수시설이다. 종로, 용산, 서대문, 마포, 중구의 쓰레기를 처리하며, 지역난방 에너지로 활용하고 있다.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를 바라보며 한참이나 생각에 잠겼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배출할 수밖에 없는 쓰레기이지만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결과도 달라지고 양도 줄일 수 있을 것 같은데 사람들의 쓰레기에 대한 경각심은 그리 높지 않아서 아쉽다. 뉴스에 종종 세계적인 축구대회나 행사를 야외에서 즐기고 난 뒤 발생한 쓰레기를 치우지 않은 탓에 문제가 되는 부분들이 나오곤 한다. 자신들이 즐겼음에도 불구하고 뒤처리는 나 몰라라 하는 식의 태도는 없어져야 하고 사회적인 책임감과 경각심을 고취시키기 위해서라도 무거운 벌금이나 제재가 필요하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하늘공원으로 변화한 난지도라 할지라도 마음 한켠이 내내 불편했다. 쓰레기산 난지도는 없어졌지만 처리해야 할 쓰레기가 있고, 소각장이 근처에 있고, 쓰레기를 주우며 살아가는 이들은 도심 곳곳에, 도심 외곽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무거운 마음으로 하늘공원 전체를 둘러보기를 포기하고 가장 궁금했던, 난지도 사람들이 살았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이동했다.

'여기 사람이 살았던 적이 있던가?'싶을 정도로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와중에 유일한 표시인 '라이온스 동산'이 있었다.

2000년 당시 쓰레기 매립지였던 난지도가 월드컵 공원으로 조성되면서 난지도 매립지 근처에 거주하던 영세민의 이주 정착금 1억 원을 국제라이온스 협회 354-A, C, D 지구에서 지원하였고, 이를 계기로 2001년 11월 3일 라이온 지도자 200여 명이 참석하여 월드컵 공원 내 라이온스 동산에 기념비를 세우고 기념식수를 함으로써 현재 라이온스 동산이 조성되었다...(뒤에 내용 생략)

앞서 서울시와 난지도 주민 사이에서 이주 보상비로 갈등을 겪고 있었다고 언급한 적이 있는데,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라이온스에서 도움을 준 듯 보인다. 제3자가 나서야 할 만큼 서울시는 난지도 주민에게 그리 너그럽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런 부분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누가 뭐래도 이곳은 우리 삶의 터전입니다.

아름다운 자연으로 존재했던 난지도를 쓰레기섬으로 바꾸고, 생존에 대한 간절함으로 모여든 사람들에게 무심하게도 쓰임을 다했으니 떠나라고 했다. 현재 시점에서 보면 죽어가는 섬을 되살리는 측면에서 개발이 아닌 공원으로 변화한 것은 분명 잘된 일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는 관심 가지고 지켜보지 않는 이상 외부로 드러나지 않은 채 잊히거나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러곤 마치 대단한 일을 한 것처럼 떠들어 댄다. 이렇게. 우리는 이러한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

고건 서울 특별시장 취임사
- 새로운 서울을 열면서: 시민과 함께 21세기로 -
존경하는 시민 여러분!
2002년 월드컵이 세계인의 축제로 서울에서 열립니다. 저는 상암동 월드컵 주경기장을 부가가치 높은 미래형 축구장으로 만들고자 합니다. 아울러 이곳과 연결되는 난지도에 '21세기 새 서울 타운'을 계획하고자 합니다.

우리 후손에게 쓰레기를 물려줄 수는 없습니다. 저는 버림의 땅 난지도를 새로운 천년의 정보도시로, 자연 생태도시로, 그리고 남북통일시대의 관문도시로 만드는 대역사를 시작하겠습니다.  이곳이 21세기를 살아갈 미래의 서울 시민들에게 바치는 위대한 선물이 되어 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 후손들은 IMF 원년에 계획을 세운 우리 세대의 의지를 반드시 기억해 줄 것입니다. 저는 임기 내에 실적을 올리려고 조바심을 내지는 않겠습니다. 이곳은 금년에 착수하여 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2048년까지 단계적으로 완공되도록 장기계획을 짤 것입니다.

2002년 월드컵은 친절하기로 소문난 일본 국민과 우리 국민 간의 경쟁과 협력 속에서 열리게 됩니다. '88년 서울 올림픽 때 세계에 보여 주었던 친절, 질서, 청결의 자랑스러운 시민운동이 지금부터 펼쳐져야 합니다. 시민 여러분들의 뜨거운 참여와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생략
<내용 출처: 상암동의 역사적 배경, dmc.seou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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