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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휘파더 Jun 15. 2021

엄마라는 쉼터

엄마를 보내고 일 년

46년생 나의 엄마가 그랬듯.... 해방 전후와 한국 전쟁 즈음에 태어난 그들의 인생은 하나하나 드라마보다 더 우여곡절 많았을 것이다. 도시든 시골이든 밥 한 끼 배불리 먹기 힘든 가정에서 태어난 그들에게는 하루하루가 생존을 위한 사투였으리라.

경남 하동의 산골 마을에서 태어난 엄마는 7남매 중 첫째였다. 엄마의 엄마, 외할머니는 시동생 시어른 뒷바라지에 생활력 끝판왕을 보여주어야 겨우 열 식구 입에 풀칠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엄마는 걷기 시작할 때부터 무한한 첫째의 역할을 부여받았고, 초등학교 졸업 후 생활 전선에 뛰어들고 19살에 처음 본 남자에게 시집을 가게 된다. 양복 한 벌만 해줄 수 있으면 좋은 신랑감을 맺어줄 수 있다는 중매쟁이의 말은 줄줄이 여섯 동생이 더 있는 외갓집에서는 사치였으리라.

참... 가진 것 없는 남자와 그렇게 첫날밤에 처음 만나 1965년 서울로 올라온다. 그때 대부분 젊은이들의 삶이 그랬듯 단칸방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하고, 줄줄이 올라오는 사돈의 팔촌 친척들까지 한방에서 기약 없는 동거 생활이 이어졌다고 한다. 하나 둘 취직을 시키고 분가를 시키고 결혼하는 것을 보고... 결국 첫째 아이는 결혼하고 9년 만에 가질 수 있었다. 딸 아들 둘 낳고 단란할 것 같았던 가족은 아버지의 빚보증으로 한번 무너지고, 엄마는 다시 방 세 개 중에 두 개를 하숙을 치고 단칸방 아닌 단칸방 생활을 시작해야만 했다. 그래도 웃음이 있고 꿈이 있던 행복한 가정은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뇌출혈로 시련을 겪어야만 했고,  42살의 엄마는 그렇게 혼자가 되어야 했다.

쉽지 않은 삶... 지금의 나보다 어렸던 그때의 엄마는 지금의 난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산 같은 존재였다.

대학을 보내고, 결혼을 시키고... 손주들을 보고.. 아들 딸의 뒷바라지를 끝까지 해주셨다. 가진 것보다 그 이상을 주었던 사람... 이제 남은 인생은 좀 더 편해지길 바랐다. 그리고 그렇게 되어 가고 있는 듯했다.

74세 여름... 고향 시골에서 이모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왔던 엄마는 갑작스러운 복통으로 병원을 찾았다. 한평생 병원 문턱 넘기를 너무 어렵게 여겼던 사람이라 아프기는 꽤나 아팠던 모양이다. 병원에선 담석이라 했다. 간단하게 제거하면 별 문제없을 거라는 의사의 말...

생각보다 수술 시간은 길었다. 수술은 잘 끝났다고 했으나, 조직 검사를 해봐야 할 듯하단다. 그리고 몇 주 후 엄마는 담낭암 판정을 받았다.

언제나 낙천적이었던 엄마는 병원 생활도 잘하셨다. 병원 친구들도 만나고 간호사들 걱정도 해주며 암환자가 아닌 듯 그렇게 병과 싸워나가셨다. 병원밥도 맛있고, 건강했을 때보다 더 자주 찾아오는 아들 딸과 보내는 시간도 좋으셨다.

아주 희망적이지는 않았지만, 관리만 잘하면 80살까지는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거라 막연히 생각했다. 그리고 그 기대는 6개월 후부터 무너졌다. 급격히 안 좋아진 체력은 동네 마실 한번 갈 수 없게 만들었고, 담즙을 빼내는 배액 주머니는 삶의 질을 급격히 떨어뜨렸다.

그즈음 구충제 열풍과 함께  유튜버들이 사람들과 소통하기 시작했다. 누나는 그들과 함께  관련 공부를 했고, 조금씩  희망을 그려가고 있었다. 구충제 열풍이 조금씩 꺼져가고 세상과 소통하던 말기  환자들도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하나둘씩 화면에서  이상   없었다.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어 갔다. 발병  10개월 마지막 항암까지  차도가 없었으나, 체력과 모든 수치가 좋아졌다고 한다. 긍정적으로 다시 항암을 해보 한다. 그리고 입원 며칠을 남겨두고 엄마는 급격히 떨어진 체력으로 응급실로 향했다. 산소포화도와 혈압 수치가 많이 떨어졌다. 의사는 패혈증이 원인인  말한다. 하루를 넘기기 힘들  같다고 한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엄마도 본인이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짐작한 듯했다. 죽으면 친구가 옆에 없어서 슬플 것 같다고 한다. 얼굴에 이쁘게 화장을 못하는 것도 슬프다고 한다. 평생 화장품이라고는 몇 개 가지고 있지 않던 엄마에게도 화장하는 시간은 그녀에게 즐거움이었나 보다. 못난 아들은 평생 립스틱 한번 선물해 주지 못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33년이 지나서, 엄마는 그 옆에 묻히셨다. 이포보가 보이는 남한강엔 노랗게 유채꽃이 피었다. 그 옛날 엄마 손을 잡고 누나와 멀미를 참으며 힘들게 힘들게 왔던 그 산소가 이제는 나 혼자 차를 몰고 혼자 쉬다 갈 수 있는 쉼터로 바뀌었다. 엄마라는 존재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자식들에게 쉼터인가 보다.

이제 벌써  년이 지났다. 맹목적으로 나를 보호해줄 부모라는 존재가 없다는 것이 이렇게 허전한 일인 줄은 감히 예상하지 못했다. 나보다 오래전 부모를 모두 잃은 회사 선배와 동병상련의 마음을 나누다 물었다. '얼마나 오래가나요?" "평생  거야."

엄마라는 단어는 그런 말인 듯하다. 무엇으로도 바꿀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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