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보내고 일 년
1987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무렵, 엄마의 나이는 42살이었다.
싱크대 상부장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엄마의 글씨로 직접 적은 노래 가사가 있던 곳은.
그 노래는 변진섭의 '홀로 된다는 것'이었다.
'이별은 두렵지 않아. 눈물은 참을 수 있어. 하지만.. 홀로 된다는 것이 나를 슬프게 해'
42살… 한창인 여인에게 남편을 잃고 어린 자식 두 명을 키우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엄마는 아버지와 이별보다 혼자됐다는 슬픔을 그 노랫말로 위로받았구나 싶다.
몇 가지 사건들이 있었다. 엄마의 서러운 눈물을 보게 만들었던..
하숙생들이 단체 행동을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집을 고쳐 방을 더 만들고 10명이 넘는 하숙생들이 있던 시절이었다. 항상 집은 북적였어도 자유로운 그런 집이었다. 하숙생들도 안방을 큰 거리낌 없이 드나들고, TV를 보고 밤 늦게 라면을 끓여먹어도 되는, 그 당시 상당히 분위기 좋은 하숙집이었다(한번 들어오면 졸업할 때까지 있다 가는 그런 집).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일이 년쯤 되었을까. 그들이 반찬이 부실하다며 엄마에게 따지듯이 개선을 요구했고, 일주일에 고기반찬 몇 회를 요구했다. 어찌 보면 20살 어린 남자애들이 먹고 싶은 것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생각도 든다. 서로의 입장을 떠나서, 엄마는 아빠의 부재를 절실히 느낀 모양이었다. 남편이 있었으면 이랬을까.. 남편이 있었으면 서럽지 않았을 텐데.. 이런 맘에 상심이 크셨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날 밤 선잠이 든 이불속에서 엄마의 흐느낌을 들을 수 있었다.
어느 날 부산에서 아침 일찍 외삼촌이 올라왔다. 아마 전날 무궁화호 막차를 타고 오신 듯했다. 엄마가 어린 시절 업고 키우고, 학교 갈 때도 데려갔었던 애지 중지한 외갓집 넷째이자 귀한 장손이다. 엄마는 예전부터 외삼촌이 어릴 때 너무 이뻐서 나중에 아들을 낳아도 이렇게 안 이쁠 거다 라고 생각하셨다고 한다. 그런 외삼촌이 새벽같이 집으로 왔다. 왠지 분위기가 좋지는 않았다. 엄마는 외삼촌한테 이런저런 하소연을 하는 듯했다. 늦은 오후 우리집 근처에 살던 엄마와 동향인 엄마 친구가 같이 자리에 하셨다. 엄마는 울고 외삼촌은 그분께 따졌다. 나중에 들었지만 아빠가 돌아가시고 가끔 그분의 남편(아빠와도 가끔 술잔을 기울었던)이 엄마를 챙겨주신 모양이다. 둘 사이의 관계를 의심한 엄마의 친구분은 지독히 모함하고 모진 말을 내뱉었다고 한다. 과부의 설움을 엄마는 어찌할 줄 몰라 남동생에게 신세한탄을 했고 외삼촌은 분에 못 이겨 막차를 타고 올라왔던 것이다.
어느 날 비가 많이 내렸다. 새벽에 눈을 뜨니 엄마는 마루 한가운데서 소리 죽여 울고 있었다. 지하실을 개조해 방으로 만든 지하방에 물이 차올랐다. 저걸 어쩌나.. 여자 몸으로 감당하기 힘든 상황에 어디 상의할 데 없던 40 중반의 여인은 아이들이 깰까 소리 내 울지도 못하고 홀로 된 외로움을 절절히 감당해내야만 했다.
지독히도 모진 인생이었다. 해방 후 동생과 집안 일에 치였던 10대, 단칸방 살이 20대, 돈 모으려 애썼던 30대, 남편 잃고 혼자 버텨야 했던 40대, 애들 대학 등록금 대야 했단 50대, 당뇨와 잦은 병들이 찾아왔던 60대.. 그리고 삶을 마감해야 했던 짧은 70대..
그래도 항상 하루하루 설렌다고 말했던 그 여인.
누구보다 밝고 호탕했던 그 웃음을 가졌던 엄마..
이제야 자랑스럽다고 글을 적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