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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우 Jul 10. 2022

퇴계 이황과 그의 후예들

이황의 말년이 깃든 도산서원과 퇴계 후손들의 독립운동이 깃든 원천마을

1,000원 지폐의 상징인 퇴계 이황. 성리학의 이기론에서 우주를 이루는 기(氣)를 우주원리인 이(理)가 이끈다고 주장한 영남학파의 대부다. 인생 말년에는 자기 고향인 예안현(현 안동시 예안면)으로 돌아와 낙동강을 바라보는 도산서당을 지어 후학 양성에 힘썼는데, 그의 사후 제자들이 서당 뒤편에 퇴계의 업적을 기린 도산서원을 설립하여 오늘날에 이른다.


도산서원 주차장을 너머 퇴계 후손들의 집성촌 중 하나인 원천마을로 가는 것을 잊지 말자. 원천마을에서 배출한 인물은 우리가 민족시인으로 알고 있는 이육사와 예안 3.1만세운동을 주도한 이원영인데, 둘 다 퇴계의 후손으로 그의 가르침을 몸소 계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퇴계가 말년을 보냈던 도산서원과 그의 후손들이 활약한 원천마을로 가보자.


이황의 말년이 깃든 도산서당과 그를 기념한 도산서원


도산서원은 안동시내에서 북동쪽에 있다. 안동시청에서 35번 국도를 따라 30분 정도 가다보면 오른편에 안동댐 건설로 조성된 인공호수가 보인다. 호수변을 따라 10분 정도 더 가면 도산서원으로 들어가는 길이 보인다.


매표소에서 5분 정도 걸어가면 도산서원의 전경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낙동강 건너편에 있는 10m 높이의 돌축대가 눈에 띈다. 그 위에 전통목조건물이 있는데, 안에는 비각이 있다. 이름은 시사단. 1792년 정조가 이조판서 이판수에게 시켜 이황의 학덕을 기리기 위한 도산별과를 치렀던 것을 기념한 비석이다. 쉽게 말하면 지역인재전형 특별과거를 실시한 것이다. 7,228명이 응시했는데, 선발은 14명이어서 상당히 경쟁이 치열했다. 


도산별과의 무대는 안동댐 건설로 수몰되었지만, 오늘날 이를 재현한 도산별과대전이 1994년부터 해마다 열리고 있다. 올해는 5월 14일에 도산서원에서 3년 만에 전면 대면행사로 열렸는데, 한시에 자신 있다면 내년에 여기에 와서 한 번 도전해보자. 


도산별과를 치렀던 것을 기념한 시사단


시사단을 뒤로 하고, 자연과 조화롭게 지어진 도산서원을 바라봤다. 말 그대로 배산임수라는 기본원리에 따라 지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원 앞에는 오래된 나무들과 우물이 하나 보이는데, 우물의 이름은 열정(洌井), 이름의 유래는 <역경>의 ‘우물이 맑아 시원한 샘물을 마실 수 있다(井洌寒泉食).’는 구절이다. 도산서당 식수로 사용했고, 두레박으로 물을 퍼내는 것과 같은 부단한 노력으로 심신을 수양해야 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도산서원 전경
도산서원의 우물 열정


도산서원은 퇴계의 말년생애가 깃든 서당이 서원 앞에 있는 특이한 구조다. 입구에서 서쪽으로 가면 농운정사라는 건물이 보이는데, 퇴계의 제자들이 머물면서 공부하던 기숙사다. 동쪽 마루는 학업공간인 시습재(時習齋, 계속해서 학습한다는 의미), 서쪽 마루는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관란헌(觀瀾軒, 물결이 흘러가는 것을 감상하는 곳)이다. 관란헌과 시습재 사이 마루 뒤로는 공부하러 온 학생들이 머무는 공간인 지숙료다.


서당은 농운정사 오른쪽에 있는데, 왼쪽에는 부엌, 중간에는 퇴계가 머물렀던 방인 완락재, 오른편에는 제자들을 가르쳤던 마루인 암서헌의 구조로 이뤄져 있다. 완락은 ‘완상하며 즐긴다.’, 암서는 ‘작은 효험을 바란다’는 의미인데 둘 다 주자의 글에서 따온 것이다.


흥미롭게도 도산서당과 농운정사는 좌우로 비슷한 선상에 있는데, 권위보다는 학문의 실천을 중시하는 이황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실제로 성균관 대사성 시절(오늘날 대학 총장에 가깝다), 26세 연하의 기대승과 논쟁을 받아줬을 정도니까.


도산서당 기숙사인 농운정사. 정면에서 왼편으로 보이는 곳이 휴식공간인 관란헌, 오른편이 학습공간인 시습재다. 중앙이 학생들이 머문 지숙료다.
퇴계의 말년 인생이 깃든 도산서당. 중앙의 방이 퇴계가 머물던 완락재, 완락재 오른편 마루는 제자를 가르쳤던 암서헌이다.


서당 뒷편 서책을 보관하고 열람할 수 있었던 두 광명실 사이를 지나면 퇴계 사후에 지어진 서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오른쪽 위에는 퇴계 이황의 신위를 모신 배향공간인 신덕사가 있다. 그 아래에는 유생들의 자기수양과 자제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전교당이, 전교당 아래에는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있다. 서원의 전형적인 수직적인 구조로 이뤄져서 그런지 말년 퇴계의 인생이 깃든 수수한 서당의 모습과 대조된다. 


전교당 왼편에 또 다른 건물이 하나 있는데, 도산서원을 관리하고 식사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기거한 고직사가 있다. 건물이 상하로 있는데, 상고직사는 도산서원 관리인들이, 하고직사는 서당의 관리인들이 거처했던 곳이다. 보통 서원하면 유생들만 생각하는데, 유생들의 편의를 위해 애썼던 관리인들의 노고도 잊으면 안 된다.


이처럼 이황의 말년인생이 깃들고 영남 남인을 대표하는 서원이라서 그런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도 살아남아 오늘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도산서원만으로 이야기를 끝내서는 안 될 것 같다. 서원 너머 원천마을로 가면 이황의 유지를 계승한 후손들의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서당 뒤로 보이는 도산서원의 초입부. 진도문을 중앙으로 두 광명실이 보인다. 광명실은 책을 보관하는 서고인데, 습기가 차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누각식으로 지었다.
보물 제210호 전교당. 도산서원의 강학공간이며, 전교당 앞에는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있다. '도산서원' 현판은 한석봉이 선조 어전에서 쓴 글씨다.
상고직사의 모습. 도산서원을 관리한 이들이 거처했다.


서원 너머 퇴계 후예들의 이야기


도산서원에서 주차장으로 다시 나와 왔던 길에서 반대편으로 가자. 가다보면 토계교가 나오는데, 여기서 단천방향으로 우회전하자. 토계천을 따라 가다보면 오른편에 큰 고택이 하나 보이는데, 퇴계 종택이다.


종택은 이황의 장손인 이안도(1541~1584)가 처음 지었지만, 구한말 화재로 불탔다. 이후 13대손 이충호가 1926년부터 3년에 걸쳐 지어 완공해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종택 오른편에 퇴계선생구택이라는 솟을대문을 지나면 추월한수정이라는 현판이 적힌 정자가 나온다. 원래 문신 권두경이 숙종 41년(1715)에 지었으나, 역시 1926년에 다시 지어 수련생들을 강의하고 문중모임의 장소로 이용하고 있다.


오늘날 퇴계 종택의 전경

종택을 뒤로 하고 언덕길을 지나면, 왼편에 요즘 지어진 현대건물이 보이는데, 그 앞에 양복을 입고 안경을 쓴 남성이 책을 들고 있는 동상이 있다. 뒤에는 절정이라는 시가 바위에 새겨져 있는데, 우리가 국어시간에 배웠던 민족시인 이육사의 작품이다.


동상 뒤로 있는 문학관에서 그의 일생을 봤는데, 이육사가 이황의 14대손이라는 것을 오늘 처음 알았다. 게다가 ‘내 고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계절’의 배경도 퇴계 이황 후손들의 집성촌인 원천마을이다. 본명은 이원록. 어린 시절 그는 이 마을의 전통대로 유학과 한학을 익혔다. 그러다가 1927년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3년간 옥고를 치르게 되는데, 이 때 수인번호가 264번이었다. 이로 인해 그의 호가 ‘육사’가 된다.


문학관 앞 이육사 동상과 그의 시 절정(1940년 발표). 당시 그는 조국 독립을 위해 무장투쟁으로 저항했다.


옥중살이를 마친 후 중외일보 대구지국 기자가 되었는데, 1930년 대구거리에서 일본을 배척하는 항일격문이 전봇대에 붙여지고, 거리에 뿌려지는 일이 일어난다. 당시 일제의 침략에 적극적으로 맞서는 기자들을 감시했는데, 일제는 이육사가 이 사건의 배후라고 보고 두 달 동안 붙잡아 고문했다.


대구격문투쟁은 이육사가 중국으로 망명하는 원인이 되었다. 망명한 후 그는 난징에 있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입교하게 된다. 학교의 교장은 바로 의열단을 세운 김원봉. 여기서 정치, 군사학, 무기 사용법, 폭탄제조, 변장술 등의 교육을 받았는데, 오늘날 사관생도들에 준하는 군사훈련을 받은 셈이다.


이육사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 시절. 학교의 교장은 의열단과 훗날 조선의용대의 수장인 김원봉이었다.

이후 1943년에 베이징으로 이동해서 국내에 무기를 들어오려고 했으나, 모친상으로 귀국했을 때 일제 헌병대에 붙잡혀 베이징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 순국하게 된다. 그의 생애를 보니 어릴 때 배운 선조들의 가르침을 몸으로 실천했다고 해야 할까. 게다가 독립을 위해서 모진 군사훈련도 받고 무장투쟁도 불사했으니 민족시인으로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립운동은 이육사만 한정되지 않았다. 이육사의 고향인 옛 원천마을로 가면 고택이 하나 있는데, ‘이원영 목사 생가’라고 적혀 있다. 그도 퇴계 이황의 후손으로 1919년 3.1운동 당시 안동군 예안장날에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실제로 이원영 뿐만 아니라 퇴계의 후손들도 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해서 일제시절 상당히 핍박을 받았다.


그는 수감 중 장로교 장로 이상동의 감화를 받아 기독교에 귀의해서 목회자의 길을 택하게 된다. 유교전통이 강했던 가문에서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특이한 배경이 있지만,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할 때 끝까지 거부하며 옥고를 치러서 조상으로부터 내려온 선비정신은 그대로 계승했다.


원천마을 이원영 목사 생가
이육사와 이원영의 고향인 옛 원천마을

경북 안동의 유교문화를 상징하는 도산서원. 낙동강 한 자락에서 후학을 양성한 말년 퇴계의 삶이 고스란히 남은 곳이다. 그가 주장했던 이기이원론은 조선뿐만 아니라 일본에도 영향을 미쳐서 당시 유교학풍을 발전시키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퇴계 이황의 후예들도 선조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했다. 민족시인 이육사는 중국으로 가서 독립을 위해 무장투쟁도 불사했으며, 마을 이웃인 이원영 목사는 예안의 3.1운동을 직접 주도하였다. 진성 이 씨 퇴계의 후손들도 독립운동에 같이 참여하여 유교의 본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했다. 그래서 도산서원과 원천마을을 모두 볼 필요가 있다. 국반(國班)의 명예를 끝까지 지킨 가문의 이야기가 담겨 있으니까.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 동시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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