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의 데이트, 그리고 기록

취업 걱정은 잊고 오직 나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시간을 통해 얻은 것

by 서연

스물일곱, 직장생활 3년 차, 마케터.

난생처음으로 으레 말하는 '공채 시즌'에 뛰어들었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기 전에 이미 첫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

운 좋게도 학과 교수님께서 그 직장에 다니고 계신 선배님을 연결해 주셨고, 그 선배님께서 제안해 주신 자리에 계약직으로 취직하게 되었다. 사실상 취업 준비 기간이 거의 없었던 것이나 다름없다.

시작은 계약직이었지만 나의 열정과 능력을 인정받아 입사 1년 후 정규직으로 전환이 되었다.

회사에 몸담은 2년 10개월 동안 단 한순간도 최선을 다 하지 않은 적이 없지만, 업무뿐 아니라 관계 부분에서도 아쉬움을 느꼈던 적이 많았고 이러한 아쉬움들이 하나둘 늘어나면서 결국 퇴사를 결정하게 되었다.


올해 9월 중순부터 본격적으로 2023년 하반기 채용 시즌에 뛰어들었고, 꾸준히 면접도 보러 다녔다. 퇴사 다음 주와 다다음주까지 계속 면접이 예정되어 있었기에 퇴사의 여유를 제대로 즐기지 못하다가, 마지막 근무일로부터 딱 2주가 되던 날에서야 비로소 모든 면접을 끝내고 한숨 돌릴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3년 가까이 되는 기간 동안 열심히 달려온, 그리고 2개월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취업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나에게 취업 걱정 없이 온전히 스스로에게 집중하며 쉴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주기로 했다.


어디를 갈까 고민하던 중, 지도에 저장만 해두고 시간이 되지 않아 가지 못하고 있었던 어느 공간이 떠올랐다. 덕수궁 쪽에 위치한 곳인데, 낮 시간대에는 책과 함께하는 사색을, 밤 시간대에는 와인과 함께하는 여유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특히 낮의 사색은 예약제로만 운영되며, 대화 금지라는 특별한 규칙이 있다. 조용히 책을 읽거나 작업을 하며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용 전날 밤이었는데도 다행히 내가 원하는 시간대에 예약이 가능했다. 카페에 2시까지 도착해야 하니, 조금 일찍 집에서 나가 서촌 소품샵도 구경하고,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책도 보고 시간 맞춰 도착하는 계획을 세웠다. 서촌, 광화문, 덕수궁. 내가 평소에도 자주 가고 좋아하는 장소들이어서 나에게 집중하는 '나와의 데이트'가 더 기대되었다.


부푼 기대감과 함께 잠에 들었고, 아침에 일어나 11시쯤 집을 나섰다. 계획했던 일정을 모두 소화하고 마침내 카페에 도착했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가니, 기대했던 것보다 더 아늑한 공간이 눈앞에 펼쳐졌다.


포근하고 따뜻한 느낌을 주는 공간, 그리고 덕수궁 돌담길이 한눈에 보이는 풍경이 마음에 쏙 들었다. 소파에 폭 안기듯 깊숙이 앉아 책을 읽을 수 있는 소파 자리에 앉을지, 뷰가 잘 보이는 창가 자리에 앉을지 고민하다 뷰를 선택하기로 했다. 자리에 앉아 탁 트인 전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세 시간, 이 시간을 어떻게 알차게 보낼 수 있을지 고민하다 우선은 책을 읽기로 했다. 평소 소설책을 좋아하기 때문에 소설을 읽고 싶었으나, 그날 따라 특별히 끌리는 책이 없었다. 그래서 기존에 읽던 자기 개발서를 완독 했다. 퍼스널브랜딩에 관한 책이었는데, 책을 읽으며 많은 것을 느꼈지만 그중 가장 중요하게 와닿았던 점은 바로 '기록의 중요성'이었다. 평소에 내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생각들, 내가 경험한 것들을 그냥 흘려보내곤 했었는데, 마케팅이 일상과 경험에서 아이디어를 얻어내고 이를 업무에 활용하는 것이 중요한 직무인 만큼 더더욱 이러한 것들을 기록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 알고 있음에도 귀찮다는 이유로 실행에 잘 옮기지 못하고 있었는데, 퇴사도 했고 남는 게 시간이겠다, 이 기회에 사소한 것까지도 기록해 보는 습관을 들여보기로 했다.


카페 이용 시간이 끝나고, 그 길로 다시 교보문고로 향했다. 평소에도 몸에 지니고 다니며 그때 그때 드는 생각을 적는 수첩을 하나 구매할 생각이었다. 연말이라 그런지 다이어리 섹션에는 연간 다이어리가 대부분이었고, 내가 찾는 작은 크기의 수첩은 종류가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간이 보이는 제품을 둘러보다가, 몰스킨의 터키색 미니 다이어리가 눈에 들어왔다. 평소에 터키색을 좋아하지도 않는데 다른 무난한 색이나 내가 좋아하는 연보라색보다도 더 이 색깔에 끌렸다. 왠지 이 터키색 다이어리가 내가 지금 겪고 있는 터닝포인트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홀린 듯이 구매해 버렸다.


평소에 내가 영화나 드라마를 보며 했던 감상들, 하루에도 수십 개씩 접하는 여러 광고나 프로모션을 보고 느낀 점들, 일상 속에서 불현듯 스쳐 지나가는 생각들을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짧은 문장으로라도 다이어리에 적어보려고 한다. 기록하지 않으면 흘러가서 휘발되지만, 기록하면 이 모든 것이 내 자산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냥 가볍게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처럼 준비한 사색의 경험이 이렇게 새로운 습관의 시작으로 이어질 수 있어서 기쁘고, 지금 가지고 있는 이 열정과 마음이 나를 더 나은 미래로 인도해 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