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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서연 Jenny Feb 18. 2021

인 연

가끔 슬프고 대체로 찬란한

    인연의 시작은 우연에서 비롯되더라도 인연의 마지막은 의지의 문제라고 믿었던 시절이 있다. 다른 고을로 떠난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 발이 부르트도록 걸어야 하는 조선 시대도 아니고, 전화와 이메일로 연결된 세상에서 인연을 이어가는 것이 너무 쉽지 않은가 말이다. 이러한 순진함이 점차 희석되면서 나는 어른이 되어 가고 있었다.



     시간이 사람과의 관계를 변화시키고, 살다 보면 극복할 수 없는 물리적 거리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제 만남과 헤어짐이 자연의 순리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너무 소중해서

    너무 소중해서 아직까지도 그 친구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온전히 기억할 수 있는 중학교 단짝이 있다. 겨울이면 항상 목도리를 휙 둘러매고 특유의 감성으로 시집을 추천해 주던 친구. 자주 만나고 싶었지만 다른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바람에 거의 일 년 만에 다시 만났을 때였다. 만나기로 한 식당의 테이블에서 친구를 마주 보는 순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그리워하던 친구는 다른 사람이 되었구나. 과거의 포스락 거리던 감수성이 전부 증발해 버린 모습이 너무나 낯설었다. 그 기분을 달리 표현할 길이 없어서 어쩔 줄 모른 채로 밥만 먹고 헤어졌다. 그리고 서로 두 번 다시 연락하지 못했다. 잠깐 사이에 벌어진 간격이 너무나 멀었고, 그 간격이 중학교 시절의 그 친구를 내 마음속에서 몰아낼까 봐 두려웠다.



펑펑 울었다

    몽골로 자원봉사를 간 적이 있다. 그곳에서 또 하나의 인연을 만났다. 십여 일이었지만 나를 '미키'라는 이름으로 부르던 친구들과 놀이터를 만들겠다고 돌을 나르면서 정이 많이 들었다. 울란바토르 공항에서 마지막  인사를 하던 날 펑펑 울었다. 또다시 몽골행 비행기를 타지 않으면 볼 수 없을 거라는 공간적 거리감 때문이리라. 그리고 이별 끝에 터져 나온 울음에는 그 거리를 내 마음으로 극복할 수 없다는 실망감도 포함되어 있었다.



대체로 찬란한

    그때로부터 십여 년이 넘게 지났다.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언젠가 찾아올지 모르는 헤어짐을 막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헤어짐의 눈물 대신 함께하는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소중하기 때문이다.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이 삶이라고 생각한다. 가끔 슬펐지만 대체로 찬란함을 안겨주었던 수많은 인연들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다가올 나의 인연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바라건대 지금까지처럼 '인연'이란 단어가 내 마음속에 포근하게 자리 잡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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