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멀리 가지 않기로 했다. #10
이사를 결심했다.
반경 2km를 옮긴다. 같은 방식으로, 다른 장소에서.
멀리 가지 않는다는 건 거리의 문제가 아니었다.
재택근무를 한다.
집이 곧 사무실이다. 화상회의를 하고, 전화 통화를 하고, 업무를 처리한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전화가 잘 안 터졌다. 처음엔 내 폰이 문제인 줄 알았다. 통신사에 전화했다. "건물 구조상 데드 존이 있습니다." 요즘 세상에 이런 곳이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현실이었다.
몇 달을 싸웠다. 통신사와, 건물 관리 사무소와. 결국은 "개선을 위해 최대한 노력해 보겠다"라는 말의 반복뿐이었다. 속이 터졌다. 시간은 흘러가고, 업무는 계속 지장을 받았다.
그리고 다른 일들도 있었다.
도어록을 잘못 누르는 이웃. 처음엔 실수려니 했다. 두 번, 세 번, 불편했다. 메인현관에서 얼굴도 처음 보는 남자가 너무도 당당하게 문을 열어달라고 한다. 무슨 관리인지는 모르겠지만, 계속되는 우연에 지치기도, 불안하기도 했다. 그렇게 작은 일들이 계속 쌓이니 이 동네는 나에게 안 맞는구나... 깨달았다.
하지만, 아쉬웠다.
호수공원, 탄이와 매일 걷던 산책로. 벚꽃이 만개하고, 단풍이 물들고, 눈이 내리던 그 길. 사 계절을 함께한 풍경. 야채가게 부부. 정육점 아저씨. 붕어빵 할머니. 닭꼬치 청년. 내 얼굴을 기억해 주던 사람들. "탄이 왔네!" 하며 반겨주던 목소리들.
동네카페. 탄이와 함께 앉아 커피를 마시던 창가자리. 책을 읽던 오후의 시간들.
이 모든 것을 떠나야 한다는 게 슬펐다.
하지만 알았다. 이 동네에서 배운 것들은 떠나도 남는다는 것을. 호수공원의 중요성. 단골 가게의 따뜻함. 산책의 가치. 동네를 보는 눈.
그걸 가지고 새로운 반경 2Km로 간다.
부동산을 다니기 시작했다.
직방, 다방, 네이버 부동산. 온라인으로 먼저 봤다. 가격, 평수, 위치, 조건을 맞추고, 사진을 보고, 리스트를 만들었다.
그리고 직접 갔다. 발품을 팔았다. 온라인에서는 알 수 없는 것들이 있으니까.
동네 부동산 문을 열었다. 실장님이 웃으며 맞이했다.
"어떤 집 찾으세요?"
"재택근무해서 조용한 곳이요. 그리고 강아지 키워요."
"아, 그럼 이 동네 딱이네요. 공원도 크고, 강아지 키우는 분들 많아요."
실장님은 동네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어느 골목이 조용하고, 어느 건물이 관리가 잘 되고, 어디에 마트가 있고, 어디에 동물병원이 있고.
온라인에서는 절대 알 수 없는 정보들. 20년 넘게 이 동네에서 일한 사람만이 아는 이야기들.
새로운 동네를 탐방했다.
탄이와 함께 걸었다. 공원을 둘러보고, 골목을 걷고, 분위기를 느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탄이를 봤다. 그리고 웃었다. 만나는 사람들이 웃으며 탄이에게 말을 걸어준다.
"아이고!! 예쁘게도 생겼네!"
"몇 살이니? 인형 같아!"
탄이는 좋아서 어쩔 줄 모른다. 사람을 좋아하는 탄이가 자신에게 인사를 걸어주고, 예쁘다고 해주는 사람들에게 최고의 퍼포먼스로 배를 보여준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함께 와!! 하고 웃어준다.
이 동네는 반려견에게 친절하구나. 몸으로 느꼈다. 강아지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동네의 온도를 알 수 있다. 귀찮아하는지. 반기는지, 무관심한지, 따뜻한지.
이 동네는 따뜻했다. 활기찼다. 사람들이 웃고 있었다.
지금 사는 곳보다 더 살아있는 느낌. 탄이도 꼬리를 흔들었다. 좋은 신호다!
계약을 진행하려는데, 문제가 생겼다.
개인 사정으로 몇 번이나 약속을 못 지켰다. 한 번, 두 번. 미안했다.
"죄송해요!" 다음 주에 꼭..."
실장님은 화내지 않았다.
"괜찮아요. 천천히 하세요. 급한 거 아니에요.!
그리고 내가 불편해할 부분들을 미리 챙겨주셨다.
"여기 베란다 쪽 소음이 좀 있을 수 있어요. 괜찮으세요?"
"재택 근무 하신다고 하셨죠? 통신 상태 확인해 드릴게요."
"강아지 키우시니까, 너무 높은 층보다는 중 이하층이 좋겠네요..
세심하다. 진심이 느껴졌다. 단순히 집을 파는 게 아니라, 내가 그 동네에서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
"새로운 동네에서 잘 지내실 거예요. 좋은 동네예요."
그 말에 기대가 커졌다. 이 동네, 이 사람들과 함께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새집 근처를 또 걸었다.
큰 공원이 있었다. 지금 살고 있는 곳의 호수공원보다 더 컸다. 산책로가 잘 되어있다. 탄이와 걸을 길.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는 곳. 동네 카페도 찾았다. 반려견 동반이 가능한 곳. 창가 자리에 앉아 탄이와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곳. 대형마트부터 야채가게, 정육점, 빵집도 있다. 버스정류장 앞에, 골목 안쪽에, 여기저기. 아직 단골은 아니지만, 곧 단골이 될 것이다. 야채가게 부부를 만나고, 정육점 아저씨와 인사를 나누고, 사장님들이 탄이 이름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이 동네에서도 나는 멀리 가지 않을 것이다. 반경 2km 안에서, 충분히 풍요롭게 살 것이다. 지금 동네에서 배운 것들을 가지고..
서울 한 복판으로 가는 게 아니다, 조용히 내가 머물 수 있는 곳이다.
재택근무가 가능한 곳. 매일 아침저녁, 탄이와 산책을 즐길 수 있는 곳, 계절을 더 잘 느낄 수 있는 곳.
풍수적으로도, 사주적으로도 나에게 잘 맞는 곳.
삶이란, 사는 곳에 따라 사람을 만나고, 생각이 변하고, 그것이 모여 나의 그릇이 된다. 더 넓은 세계보다 더 큰 세계보다, 이제는 나에게 맞는 세계가 중요하다. 소소하고도 중요한 나의 순간들을 더 선명하고, 확실하게 기록할 수 있는 곳. 그런 곳으로 간다. 아니, 그렇지 않은 곳이라 해도 그렇게 만들 것이다.
멀리 가지 않기로 했다는 건, 집착이 아니다. 한 곳에 박혀 있는 게 아니다.
내 삶에 맞는 반경 2km를 찾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뿌리내리는 것이다. 호수공원을 걷고, 동네 가게에서 장을 보고, 카페에서 책을 읽고,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는 것.
새로운 동네에서도 나는 같은 방식으로 살 것이다. 단골 가게를 만들고, 산책길을 찾고, 이웃과 관계를 맺고.
반경 2km는 옮겨도 괜찮다. 중요한 건 거리가 아니라, 그 안에서 사는 방식이니까.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이사 날짜를 잡았다. 짐을 싸기 시작했다. 호수공원을 보며 생각한다. 곧 떠난다는 것을. 하지만 두렵지 않다.
새로운 반경 2km가 기다리고 있다. 공원, 활기찬 동네, 따뜻한 사람들. 탄이와 함께 걸을 새로운 산책로.
나는 이 동네에서 배웠다. 멀리 가지 않아도 충분히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동네 가게의 가치를, 단골의 의미를, 산책의 기쁨을. 그 배움을 가지고 새로운 곳으로 간다.
같은 방식으로, 다른 장소에서. 반경 2km를 옮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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