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팡을 버리고 동네 가게를 선택한 이유

나는 멀리 가지 않기로 했다 #9

by 운채



나는 새벽 배송에 길들여져 있었다


밤 11시에 클릭하면 아침 7시에 문 앞에 도착하는 마법. 생수, 휴지, 세제, 야채, 고기,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추천 목록에 뜨는 것들을 장바구니에 담고, 결제하고, 잠들면 됐다. 편리했다. 시간도 절약됐다. 가격도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생각하지 않아도 됐다. 알고리즘이 내가 필요한 것을 다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나는 새벽배송의 충실한 고객이 됐다. 아니, 정확히는 알고리즘의 충실한 소비자가 됐다.



쿠팡 사태를 보며

뉴스를 봤다.

쿠팡 물류센터의 화재, 과로사하는 쿠팡 현장직들, 새벽 2,3시에 일하는 사람들, 그들의 지친 얼굴, 노동 착취, 갑질. 나는 멈춰 섰다. 내가 누리는 편리함이, 누군가의 허무한 희생 위에 있다는 것. 클릭 한 번의 뒤편에, 잠 못 이루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새벽배송의 이면에, 새벽노동이 있다는 것. 쇼핑은 단순히 돈을 주고 물건을 사는 행위가 아니었다. 그 행위에는 내 기준이, 내 도덕성이, 내 정의가 담겨야 했다. 최소한 나만의 선택이 있어야 했다.


나는 결심했다. 쿠팡을 해지하기로. 뒤도 안 보고, 주저하지 않고, 그렇게.



동네 가게를 찾아서

쿠팡을 버리니 막막했다. 이제 어디서 장을 봐야 하지? 무엇을 사야 하지? 그동안 알고리즘이 알아서 추천해 주던 것들을 이제 내가 직접 찾아야 했다. 그래서 동네를 걸었다. 탄이와 산책하며, 주변을 관찰하며, 가게들을 찾아보았다. 버스 정류장 앞에 야채가게가 있었다. 부부가 운영하는 작은 가게, 그동안 수 없이 지나쳤지만, 한 번도 들어가 본 적 없었다. 쿠팡 새벽배송으로 다 받았으니까.


그 옆에 정육점이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고기들이 보였다. 신선해 보였다.

과일가게도 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운영하시는 곳. 과일들이 알록달록 진열되어 있었다.

동네 빵집, 해장국 집, 순댓국 집, 이 모든 게 집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었다. 그동안 몰랐다. 아니, 볼 필요가 없었다. 클릭 한 번이면 됐으니까.



야채가게 부부의 미소

처음 야채가게에 들어갔을 때, 어색했다.


"어서 오세요!"

부부가 함께 웃으며 인사했다.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쿠팡 배송은 조용히 문 앞에 놓고 가는데. 인사를 받는 게 낯설었다.


"뭐 필요하세요?"

"저... 야채 좀 사러 왔는데요."

"둘러보세요. 오늘 들어온 거 다 싱싱해요."


나는 야채들을 하나하나 살펴봤다. 직접 보고, 만지고, 고를 수 있었다. 사진으로만 보던 야채들을 눈으로 확인하니 만족감이 달랐다. 싱싱한 것을 내가 직접 골랐다는 안심감.


"이거 주세요."

"좋은 거 고르셨네요. 오늘 아침에 들어온 거예요."


부부는 계속 웃고 있었다. 그 미소가 처음엔 어색했지만, 지금은 익숙하다. 그 목소리가, 그 따뜻함이.



정육점 아저씨의 우렁찬 목소리

정육점 문을 열었다.


"어서 오세요"

우렁찬 목소리. 큰 미소. 정육점 아저씨였다.


"오늘 뭐 드실 거예요?"

"삼겹살이요."

"한돈으로 드릴까요? 목살도 좋은데."

아저씨는 여러 부위를 보여주셨다. 삼겹살, 목살, 항정살, 등심, 그리고 오겹살.


"오겹살도 있어요?"

나는 놀랐다. 오겹살이 있다는 건 알았다. 하지만 그동안 쿠팡에서는 한 번도 사 본 적이 없었다. 매일 추천해 주는 건 한돈 삼겹살, 목살, 한우 항정상, 등심 알고리즘이 정해준 것들...


"오겹살 맛있죠. 고소해요. 한번 드셔 보세요."

그날 저녁, 오겹살을 구웠다. 고소했다. 맛있었다. 그동안 왜 몰랐을까? 알고리즘이 보여주지 않았으니까.


"안녕히 가세요!"

나가는 길, 아저씨가 우렁차게 인사했다. 처음엔 어색했다. 너무 시끄럽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목소리 때문에 더 자주 가게 된다. 사람의 온기. 그게 그립다.



알고리즘이 만든 틀

쿠팡을 버리고 나서야 깨달았다.

나는 선택하지 않았다. 알고리즘이 선택했다. 내가 클릭한 것들을, 구매한 것들을, 알고리즘이 분석했다. 그리고 추천했다. "당신은 이걸 좋아할 거예요""이것도 살까요?"


먹던 것, 입던 것, 샀던 것. 그것만 계속 반복됐다. 새로운 선택은 없었다. 오겹살처럼, 있는데 보이지 않는 것들이 많았다.

편리했지만, 제한됐다. 빨랐지만, 좁았다. 쉬웠지만, 수동적이었다.

나는 알고리즘의 틀 안에 갇혀 있었다. 그걸 편리함이라고 착각했다.



주체성의 회복

동네 가게에서 장을 보는 건 불편하다.

직접 가야 한다. 시간이 걸린다. 무겁다. 선택해야 한다. 고민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이제 선택한다. 내가 직접, 어떤 야채를 살지, 어떤 고기를 살지, 어떤 과일을 살지, 내 눈으로 보고, 내 손으로 고르고, 내 판단으로 결정한다.


주체성을 되찾았다. 소비자로서의 자존감을 세웠다.

알고리즘에 끌려다니지 않는다. 편리함에 중독되지 않는다. 누군가의 희생 위에 서 있지 않는다.



너무 늦게 깨달은 것들.

아쉽다.


그동안 시간이 없어서 쿠팡을 이용한 건 아니었다. 그냥 편했다. 생각하지 않아도 됐다. 클릭 한 번이면 됐다. 왜 우린 쿠팡의 새벽배송에 모든 걸 걸었을까. 왜 알고리즘을 믿었을까. 왜 동네 가게를 외면했을까.

버스 정류장 앞 야채가게, 그 옆 정육점. 과일가게, 빵집, 식당들. 모두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었는데.

쿠팡은 편리함을 주는 대신, 많은 것을 가져갔다. 나의 선택권, 동네 가게의 생존, 배송 기사들의 삶, 그리고 갑질. 너무 늦게 알았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알았다는 게 다행이다.


이제 나는 직접 장에 간다. 마트에도 가고, 반찬가게에도 가고, 재래시장도 가본다. 탄이와 산책하며, 동네 가게들을 둘러본다. 시간이 걸려도 괜찮다. 조금 비싸도 괜찮다. 불편해도 괜찮다. 내가 직접 보고, 직접 고르고, 직접 선택한다. 사장님과 인사를 나누고, 단골이 되고, 관계를 만든다. 야채가게 부부의 미소, 정육점 아저씨의 우렁찬 목소리. 과일가게 할머니의 덤. 그 작은 것들이 주는 온기. 편리함을 버리고 얻은 것, 주체성. 자존감. 관계. 그리고 동네.



멀리 가지 않아도

쿠팡 새벽배송은 전국 어디든 간다.


하지만 나는 멀리 가지 않기로 했다. 집에서 걸어서 10분. 그 안에 내가 필요한 모든 게 있다.

알고리즘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다. 클릭이 아니라, 발로 걷는다. 편리함이 아니라, 관계를 택한다. 동네 가게에서 장을 본다. 사장님과 인사를 나눈다. 오늘 뭐가 좋은지 물어본다. 새로운 것을 발견한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멀리 가지 않아도, 빠르지 않아도, 편리하지 않아도 내가 선택한 삶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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