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줍줍.
2024년 새해, 작년과 같은 나이를 맞이했다. 정부 정책 덕분(?)이다. 끊임없이 올라가던 나이가 주춤하자 작년, 같은 나이였을 때의 내 모습이 궁금해져 핸드폰 사진과 모닝 페이지를 뒤적였다. 시간 여행을 떠난 듯 집중해 본 사진과 글 안에서 이젠 낯설어져 버린 나를 발견했다.
1년 전의 나는 시간 강박의 대명사였다. 사용가능한 실용 위주의 도서만을 읽고, 문학적 도서는 아예 소비하지 않았다. 낭비되는 시간을 참지 못했고 여유보다는 바쁨을 좋아해 번아웃에 빠져도 울면서 일을 하는 일 중독자. 그런 내가 짧은 시간 동안 많이도 바뀌었다. 어쩜 사람이 바뀌지 않는다는 말은 거짓말일지도 모르겠다. 가랑비에 옷 젖듯 바뀌어간 1년은 아픔도 많았지만 나를 훨씬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다. 지금의 나는 일상 에세이 읽는 것을 좋아한다는 취향도 생겼고, 힘들면 쉴 줄도 알며, 작년보다 운동과 피아노, 그리고 글쓰기를 열심히 하는 그런 사람이 되었다. 여전히 충동에 사로잡히고 힘든 시간을 보낼 때도 있지만 그래도 그 또한 나임을 알기에 이겨내고 때로는 져주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
오늘은 에세이를 읽다가 문득 '잘 사는 게 뭘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하나뿐인 인생을 참 잘 살고 싶었다. 그런데 어떤 게 잘 사는 건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지 못했다. 가난했던 학창 시절에는 그저 부자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나이가 들수록 부자만이 답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그뿐이었다. 내면은 어때야 하는지, 대인 관계는 또 어때야 하는지… 완벽이라곤 없는 삶 속에서 잘 사는 건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남들보다 화려하게 사는 부자, 내면이 충실하게 다져진 도인, 적당히 어우러진 균형인.. 이 중 더 잘 사는 사람은 누구일까. 고민을 계속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각기 다른 방향으로 깨어져버린 유리 조각을 그저 줄 세우려 하는 기분이 들었다.
지난 1년을 돌아보며 문득 떠오른 단어는 '행복'이었다. 다소 식상하지만 나는 아직까지 이보다 더 나은 답을 찾지 못했다. 국어사전에서는 행복을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함, 또는 그런 상태'로 정의했다. 나는 행복을 보물 찾기라 생각해보려 한다. 어린 시절에 공원에서 하던 그 보물 찾기처럼, 나만의 길을 걸으며 작은 행복들을 쏙쏙 발견해 내는 사람이 행복해지는 거라면 어떨까. 주변을 둘러보며 여유 있게, 그리고 끈기 있게 걸어간다면 우리는 살짝궁 숨어있는 작은 행복들까지 더 많이 찾아낼 수 있을 것이었다.
사실 잘 살아간다는 것을 성취와 성공에 대입한 적도 있었다. 급한 마음으로 앞만 보며 질주하던 과거의 나는 내 주위에 숨겨져 있는 작은 행복들을 보지 못했다. 수많은 행복을 무시하며 내달린 그 끝에서 날 기다린 건 번아웃과 자살충동이었다. 한 번 떨어진 낭떠러지에서 크나큰 괴로움을 겪었지만, 덕분에 이제는 전혀 다른 종류의 행복들을 마음에 담는다. 수다에서 느껴지는 소소한 즐거움, 드라마를 보며 느끼는 통쾌함, 물의 시원한 감촉, 여유 있는 웃음… 이전에는 제대로 느끼지 못했던 감각들이었다.
작은 행복은 어디에나 있다. 이 말엔 힌트가 있다. 즉, 행복은 외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내 마음을 자세히 들여봐 주고 보듬어 준다면 우리는 누구나 안에 핀 작은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 나는 이 행복을 발견하는 일이 가장 힘들었다. 특히 내 안의 마음을 살펴봐주고 보듬어줘야 한다는 건 우울증이 걸린 후에나 알았다. 그전까진 바위 덩어리인 마냥 내 마음을 무시하고 살았다. 왜 무기력한지 알지 못했고, 왜 울고 있는지 생각해내지 못했다. 그저 다른 사람은 이겨내는 상황들을 내가 나약하기 때문에 힘들어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우리는 너무 멀리에서만 행복을 찾는 경향이 있다. 내 안을 들여다보고, 나의 사람들과 함께 하는 과정이 선행된다면 우리는 반드시 작은 행복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어쩜 더 행복하게 잘 살고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