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n번째 대본 수정을 하고 있다.
그간 미뤄졌던 뮤지컬 공연의 구체적 일정이 나오기 시작했다.
당선만 된 채 하염없이 미뤄지던 스케줄은 이제야 극장 대관이 잡혔고, 얼마 후면 드디어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지원금을 받게 된다. 이제 정말 공연을 눈 앞에 두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 내 대본은, 미완성이다.
이 글을 쓰는 현재 시점에서 대본은 2장까지 나왔다.
이게 무슨 일인고 하니, 풀 대본으로 제출했던 버전이 있지만 작품의 완성도를 위해 퇴고를 하며 수정을 하다 보니 나중엔 기획 방향이 달라지게 돼서 기존 대본을 바탕으로 새롭게 다시 쓰고 있는 것이다.
연출님과 나는 여러 번의 회의 끝에 기존에 제출했던 대본을 고치고, 고치고, 또 고쳤는데
코로나로 인해 일정이 미뤄지고 대본을 수정할 시간의 여유가 생기면서 더 많은 아이디어가 떠올랐고
이 때문에 새로운 콘셉트에 대한 의견이 나와 극을 시놉시스 단계에서부터 다시 구상하기 시작했다.
이미 초고에서부터 수십 번을 뜯어고쳐온 나에겐 이 과정이 무척 난감하고 힘든 과정이었다. (아마 첫 구상보다 더 힘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어쩌랴. 회의에서 나온 아이디어가 이전보다 훨씬 더 좋다는 걸 알아버렸는데.
작가는 별 수 없다. 조금이라도 덜 후진 작품을 만들려면 그저 고치고 또 고치는 수밖에.
사실 이게 연극이라면 뮤지컬보단 조금 수월했을 것이다. 뭐가 어찌 됐든 나만 머리 싸매고 고치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뮤지컬 극작에선 글 말고도 필수 요소가 하나 더 있었으니.... 바로 '음악'이다.
공모전에 제출할 당시 대본은 완고 상태였고 (추후 수정이 필요한 단계였지만) 음악은 약 70%이상 완성되어 대략 3곡만 더 작곡하면 작곡이 끝나는 상황이었다. 물론 넘버만 세 곡이고 사이사이 들어가는 배경음악은 또 다른 얘기긴 하지만 어쨌든 중요한 건, 내게는 이미 확실히 나와버린 곡이 10여 곡이 넘게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편곡까지 마친. 즉 이 상태에서 극을 수정을 하려면 가능한 기존 곡을 손대지 않도록 노력하며 극을 수정을 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엄청난 노동이 필요하다는 게 지금 내가 쓰기싫어증에 걸린 이유다.
작곡가는 작가의 대본 속 극적 상황과 분위기, 가사의 내용을 최대한 살려 곡을 쓰는데, 예를 들어 긴장감 있고 비극적인 장면이 밝고 경쾌한 분위기로 바뀌어버렸다면 이전에 만들었던 곡은 쓸 수가 없다.
그리고 그 곡의 앞뒤에 나오는 배경음악도 다 버리게 된다. 흐름에 맞지 않기 때문에.
심지어 단어 하나만 바뀌어도 음에다 붙였을 때 원래 단어만큼 안 붙는 경우가 다반사기 때문에 가사를 바꾸는 것 자체도 무척 까다롭다.
글이야 이리 쓰고 저리쓰면 그만이라지만, 이미 글에 맞게 만들어진 곡을 바꿔 쓴다는 건 내 잘못을 작곡가에게도 전가하는 느낌이라서 가능하면 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곡 하나가 달라지면 편곡하는 분도 다시 작업을 해야 한다. 물론 극의 발전을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수정이 필요하긴 하다. 하지만 아무래도 내 능력 부족으로 수정하다 여러 사람에게 피해를 끼친다는 생각이 들다 보니 나로선 최대한 음악을 그대로 유지하며 고치려 노력한다. (...이것 때문에 내 흰머리가 늘었나 보다)
그래서, 결론이 뭐냐면, 싹 다 바꿔보자고 하는 연출님과
싹 다 바꾸는 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작가가 만나
몇 날 며칠을 머리 맞대고 회의해서
한 달이 넘게 걸려 다시 시놉시스를 썼고,
그래서 현재 대본은 달랑 2장까지 밖에 없다는 슬픈 얘기다.
글 쓰는 것을 업으로 해보니, 내게 정말 '완고'란게 있기나 할까 라는 생각이 든다. (더불어 완성하신 작가분들이 존경스럽다.)
나는 짤막한 글을 하나 써도 다시 읽고 고치고, 또 고친다. 그러니 수십 장 분량의 대본은 말할 것도 없다. 누군가 말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라고.
그렇다 작가의 수정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글쓰기는 엉덩이 싸움이고, 수정의 연속이며 고치는 것만이 살길이다.
하지만 때로, 나란 글쟁이는 그 과정이 싫어서 아 몰랑 나 안 해! 하고 하루 종일 놀다가 밤 열두 시쯤 되면 내가 미쳤지 하고 한숨을 쉬며 다시 컴퓨터 앞에 앉는 것이다. 그리고는 대본을 몇 줄 끄적이다가, 머리를 감싸 쥐고 난 쓰레기야. 망했어라며 자괴감에 빠져서 도리질을 하다가, 결국 도망친다.
어디로?
브런치로.
아.
아아...
기껏 도망친 게 브런치라니.
기껏 글 쓰기 싫다고 내뺀 게 글 쓰는 플랫폼이라니.
헛웃음이 나온다. 나도 참 노답인 사람이구나. 잘 쓰지도 못하면서, 어지간히 좋아하긴 하나보다.
휴... 그러니 어쩔 수 없지. 다시 정신 차리고 머리 그만 쥐어뜯고, 대본이나 더 써야겠다.
언젠가 끝없는 수정을 끝내는 날이 오길 바라며.
(그런 날이 오긴 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