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 윤 May 10. 2021

엄마 아빠에게 딸이란

부제: 나는 언제쯤 어른이 될까



우리 엄마와 아빠는 두 분 다 지병이 있으시다.

엄마는 신장병이 있으시고 아빠는 당뇨와 고혈압을 앓고 계셔서, 두 분 모두 어느 정도 먹는 것 신경 써야 하고 약도 잘 챙겨 드셔야 한다. 아빠는 성격이 무척 꼼꼼하신 편이라 약도 운동도 병을 알게 된 그 순간부터 잘 챙기시는 편이었지만 엄마는 약을 깜빡하는 때가 많으셔서 내 하루 중 마지막 일과에는 엄마  약 챙기기가 반드시 포함되어 있다. 반대로, 엄마는 약은 깜빡하셔도 식단 조절은 비교적 잘 해내시는 편이고 아빠는 워낙 자극적인 음식이나 군것질 거리를 좋아하셔서 식단 관리에 조금 소홀히 하신 편이다. (솔직히 식탐이 많은 나로서는 십분 이해가 가긴 한다.) 한 번은 아빠를 위한 아침 식사 대용품으로 당분이 적은 '특별한 k'시리얼을 사둔 적이 있었는데, 아빠가 이건 맛이 없다며 달디 단 빵을 드시는 것을 보게 되었다. 몇 번  그런 모습을 목격한 나는 아빠에게 '아빠, 당이 많아서 안 좋아. 다른 거 드셔. 특별한 k 있잖아. '하고 잔소리를 했고 내 잔소리에 아빠는 '맛없어'라면서 못 들은 척 빵을 드셨다. 그런 아빠의 모습에 내가 다시 한번 잔소리를 하자 아빠는 먹던 것을 탁 내려놓으시며 '그럼 네가 당뇨식으로 차려주던가! 이것도 못 먹으면 어떻게 하라고! 뭘 차려주고나 그런 소릴해!'하고 소리를 치셨다. 평소에 아빠는 아침식사를 스스로 챙겨서 드셨고 그 외에 식사는 엄마가 챙기시기 때문에  갑작스러운 호통에 나도 엄마도 당황했다. 나는 아빠에게 왜 그런 말씀을 하시냐, 나는 그저 걱정돼서 그런 거다 라고 말하자 아빠는 여전히 내게 화를 내면서 먹을 거 하나도 없는데 제대로 먹지도 못하게 한다며 식탁을 뜨셨다. 그날 이후로 나는 아빠에게 단 것을 드시지 말란 잔소리를 하지 않는다.

대신 어느 날 남동생이 단 걸 드시는 아빠에게 당뇨에 좋지 않으니 그런 거 드시지 마시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의 말에 아빠는 묵묵히 고개만 끄덕이셨을 뿐 나에게 했던 것처럼 화를 내거나 소리를 치진 않으셨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씁쓸히 웃었다. 내가 동생보다 아빠에게 쉬운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아빠에게 남동생은 나보다 조금 어려운 사람이다. 반면 딸인 나는 그보단 조금 마음 놓고 투정 부리고 화를 낼 수 있는 사람이기에 아빠는 당뇨로 인한 스트레스를 나에게 투정 부리듯 표현하신 것이었다. 아들에겐 못하시지만 딸인 나는 편하시기에.


엄마와 나의 관계는 더욱 미묘해서 친구 같지만 더 복잡한 관계였다.

어느 순간 대학생이 되고부터 나는 엄마와 함께 집안의 대소사를 걱정하고 들어 드리는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대학생 때  음대에 재학 중이었고 남동생은 외국에 유학생활중이었는데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음대생과 유학생을 뒷바라지한다는 것은 당연히 무리일 수밖에 없었다. 이에 엄마는  금전적 스트레스를 호소해 오곤 하셨는데 나 역시 죄송스러운 마음이었지만 당장 용돈 벌어 쓰며 공부하기 바쁜 터라 딱히 엄마의 걱정을 해결해 줄 방법이 없'내가 뭘 어떻게 해야하지'는 생각에 곤란함 느꼈다. 하지만 그래도, 그래 나 아니면 어디다 말씀하시겠냐, 라는 생각으로 엄마의 말을 들어드리고 함께 걱정하면서 한숨짓는 게 다인 그런 시절이었다. 한편으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속상하기도 했고, 그래도 엄마의 말이라도 들어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엄마는 걱정이 많으신 분이었으나 동시에 걱정을 내비치기 싫어하는 분이셨고 그런 엄마가 유일하게 의지하는 사람이 바로 나였기에 내가 엄마에게 '의지되는 착한 딸'로서의 역할을 해줄 수 있다는 것이 약간은 뿌듯하게 느껴지기도 한 것이다. 다만 여기서 생긴 부작용은, 그렇게 편한 딸이기에 가끔 내가 엄마의 감정 쓰레기통이 될 때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특히 우리 집의 경우에는 대학교 때부터 내 동생이 유학으로 인해 장시간 집안을 비우면서 집에 남아있는 자식이 나 하나였고 엄마는 걱정이 있어도 매일 통화하는 이모들에게조차 잘 말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오히려 그런 엄마의 걱정을 곁에서 보고 듣는 사람은 나였고, 동생에게 학비를 보내는 때에도 엄마는 아빠보다 내게 먼저 어려움 토로하곤 하셨다. 대학교 2학년 때던가. 어느 날에는 수업을 듣다가 동생 학비 걱정과 내 등록금 걱정을 동시에 하면서 아르바이트 월급날을 떠올리는 날 보며 왜 내가 이런 걱정을 해야 하지라는 생각에 한숨짓기도 했다.




난 단 한 번도 혼자 산적 없이 부모님과 쭉 같이 살아왔기에 엄마 아빠에게 더없이 편한 자식이었다. 스무 살부터 십 년을 외국에서 혼자 살다 들어온 동생과, 한 번도 부모 곁을 떠나지 않은 딸과의 마음속 거리는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었다. 자식을 사랑함에 있어 편차가 있는 건 아니지만, 누구와 더 많은 시간을 살을 맞대고 살았는지에 따라 자식을 대하는 편안함이 달라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일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서른이 넘어가고, 결혼하기 직전에는 정말로 엄마와 수도 없이 싸웠다.

나는 이미 머리가 클 만큼 커서 자기의식이 뚜렷하고 주장이 확고한 한 사람의 완벽한 성인이 되어버렸고 (여기서 '완벽한' 이란 인간적으로 완벽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한 명의 주체적 성인으로서의 완벽함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에 반해 엄마에게 나는 여전히 품 안의 자식이었다. 더군다나 엄마와 나의 성격이나 성향은 완전히 달라서 그 때문에 우리는 한 번씩 크게 다투곤 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나는 더욱 결혼해서 집을 나가는 날을 고대했었다.

하지만 행복한 삶을 꿈꾸며 시작했던 결혼생활이 이혼으로 끝나고 집에 돌아오자, 여전히 전과 다를 바 없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처음엔 가족들 모두가 나를 위해 조심해주면서 서로 부딪힐 일이 없었지만 한 달쯤 지나자 모두가 예전의 생활을 되찾아갔고 그러면서 다시 나는 엄마와 예전 같은 관계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엄마에게 의지되는 자식이자, 의지해도 되는 자식이자, 조금은 편하게 마음 놓고 내 기분대로 대해도 되는 자식으로.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나의 이혼이 잊혀져 가면 잊혀져 갈수록 나는 예전의 역할로 돌아가 엄마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맞춰주는 착한 딸이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전보다 더 생각이 많고 성숙한 사람이 되어 있었고 반면에 엄마는 여전히 나를 예전의 미성숙한, 엄마 밑에 어린 딸아이로만 대했다.

내가 하는 행동과 엄마가 가진 생각이 부딪히고 서로를 이해하지 못할 때면 일방적으로 깨지는 건 언제나 내쪽이었다. 엄마와 자식 간의 관계에서 옳고 그름이나 가르침이 필요한 문제라면 당연히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이었으나 그것이 성인이 된 자식과의 생활방식의 문제, 가치관의 문제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어느새 나는 엄마와의 관계에서 조금씩 스트레스를 받게 되었고 그것이 쌓이고 쌓여 몇 달 전 결국 크게 한 번 폭발하게 되었다. 그날의 다툼에서 나는 마음먹고 처음으로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는 내가 막 대해도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무슨 일이 있을 때 내게는 짜증 내도 되고, 큰소리쳐도 되고, 잘못해도 잘못했다 말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인 것 같다고. 내가 그렇게 말했을 때 엄마는 순간 움찔하는 모습이었지만 그럼 내가 너 아니면 누구한테 말하니!! 라면서 되려 큰소리를 치셨다. 그 말에 나는 할 말을 잃었고 그날 우리의 대화는 그렇게 확인사살만을 하고 끝났다. 어색한 하룻밤이 지나 다음날, 엄마는 어쩐지 전보다 작아진 모습으로 내게 말을 걸어오셨다.


"...딸. 엄마가 미안해. 네 말이 맞아. 아무래도 내가 너한테 좀 그런 게 있지... 근데 너 아니면 누구한테 그러겠니. 미안해. 조심할게. "


그것은 엄마 나와의 관계에서 처음으로 잘못된 점을 인정하고 말해준 솔직한 사과였다.


며칠 전, 엄마가 임플란트 수술을 받고 오신 날 통증이 심해서 얼굴이 퉁퉁 부었었다. 대중교통을 타겠다는 엄마의 고집을 겨우 꺾어 차로 모시고 갔다가 모시고 오고, 신장병 때문에 통증 약도 못 먹는 엄마가 안쓰러워 죽을 사 오고, 빨대로 드실 수 있게 물을 준비하고 이부자리를 깔고 난리를 피웠는데, 엄마는 통증 때문에 나에게 짜증만 내기 일 수였다. 아프니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엄마를 위해 이리저리 동분서주하는 나에게 하루 종일 짜증으로만 일관하자 섭섭함이 밀려들었다. 저녁에 엄마의 신장 약을 챙겨드리고 평소 좋아하시는 커피라도 한 잔 드릴까 여쭤보는데, 엄마가 아파 죽겠는데 뜨거운 커피를 어떻게 먹으란 말이냐며 짜증을 내셨다. 그 말에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오는 걸 참고 엄마에게 말했다.


"미안해 엄마.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먹고 계셔서 미지근한 커피라도 드릴까 물어봤어. "


"안 먹어. 삼키기 힘들어 죽겠는데 무슨 커피야 커피는."


"... 알겠어. 근데 엄마. 조금만 부드럽게 말해주면 안 될까. 난 엄마 걱정돼서 그런 건데..."


예전같으면 그냥 조용히 듣고 넘어갔을 일을 이번엔 그냥 넘기지 않았다. 내가 조심스럽게 웃으며 말하자 엄마도 순간 아차 싶었는지 잠시 말이 없으시더니  으응... 하고 희미하게 웃어 보이며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살짝 끄덕이셨다. 그 모습에 나도 미안해져 순간 괜한 말을 했나 싶었지만 그 말을 한 것이 후회되지는 않았다. 나 역시 이젠 더 이상 상처 받기 싫었기에.




최근들어 엄마의 약을 챙겨드리는 저녁이나 잠자리 침구를 펴 드리는 밤, 아빠에게 야식을 만들어드리거나 커피를 내어드릴 때, 나는 가끔 농담 식으로 말한다. 봐봐. 나밖에 없지?

그리고 거기에 한 두번 정도 덧붙인 적이 있다. 봐봐. 그러니까 나한테 조금만 잘해줘.... 하고.

가끔 엄마나 아빠가 내게 너무 감정적으로 대했다고 느꼈던 날, 그래서 마음이 힘들거나 섭섭했던 날에는 돌려서 이렇게 내 기분을 말해보곤 하는 것이다. 엄마 나한테 잘해줘. 엄마와 아빠가 내가 편한 건 알지만 그래도 막 대하면 내 마음이 아파. 그러니까 아프지 않게 어느 정도의 선은 넘지 않아 줬으면 좋겠어.라는 뜻으로.

 

가장 밀접하고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인 가족.

그들과의 관계는 때로는 너무나 편안하고 당연해서 타인에겐 당연히 지키는 예의와 선을 나도 모르게 넘어버리는 때가 있다. 밖에서 다른 사람에겐 웃으며 넘어갔을 일을 동생이나 엄마에겐 짜증으로 말하면서 넘기고, 엄마가 가끔 부탁해오는 인터넷 쇼핑도 엄청 귀찮아하면서 생색을 내며 해드리곤 한다. 막상 친구가 부탁해올 때, 지인이 물어볼 때는 친절하게 가르쳐 주면서 말이다.

가장 사랑하니까, 편안한 존재니까 그래도 된다고, 마음 놓고 내가 편할 대로 대해도 된다고 생각해버리는 것이 때로는 얼마나 큰 잘못인지 깨닫지 못할 때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이해할 거라 생각하고 내 기분대로 마음껏 행동하면 그도 '사람이기에 '상처 받는다는 것을, 편하다고 해서 내 마음대로 말을 내뱉으면 그 역시 지켜야 할 '선'을 넘어 버려 마음에 상처 내는 일이라는 것을 나는 가끔 잊어버리곤 한다.

그리고 그것을 잊었을 때 엄마가 내게 상처를 주고 아빠가 큰 소리를 내었던 어느 날처럼 나 역시 수도 없이 엄마 아빠에게 더 많은 상처를 주었으리라.





엄마에게 내 속 얘기를 털어놓고난 이후 한동안 가까운 사람들-가족과의 관계에 대한 생각 하던 어느 날에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자식을 낳아 기른다면 우리 부모님이 내게 했듯이 그런 헌신과 무조건적인 희생을 당연한 것처럼, 아무 조건 없이 해줄 수 있을까? 나는 부모님에게 이런 점이 섭섭하고 이렇게 해주었으면 좋겠다 라고 계속해서 바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엄마는, 아빠는, 내게 뭔가를 바랐던 적이 있던가? 내게 이러이러한 것을 해주면 좋겠어, 이게 불편해 이렇게 해줘,라고 말했던 적이 있던가?

아니. 없었다. 단 한 번도 부모님은 내게 뭔가를 요구하거나 바라지 않는다. 그저 내 말을 들어주시고, 미안해하고, 더 잘해주지 못한 것을 속상해하실 뿐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자 나는 걷잡을 수 없이 창피해졌다.

그랬다. 나는 아직도 어린아이였다. 엄마 아빠에게 이렇게 해줘 저렇게 해줘 나 좀 사랑해줘, 예뻐해줘 하고 칭얼거리는 아직도 한참 모자란 어린아이. 자기가 어른인 줄 알지만 부모님보다 내가 더 중요한 몸만 크고 마음은 여물지못한 어른 아이. 하지만 정작 엄마와 아빠는 부모라는 이름으로 모든걸 품어 안고 단 한 번도 내게 원하는 바를 말하거나 모자란 바를 채우라 말하지 않는다. 그게 바로 부모님과 나의 다른 점이었다.

맞다. 나는 아직도 어른이 되려면 한참 멀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