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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또봉씨 Oct 10. 2021

6년의 연애

연애 회고

영종도에 그 남자가 살았었다. 우리 집에서 전철로는 두 정거장이지만 거리는 꽤 된다.

남자를 동호회에서 알게 되었지만 몇 개월간 서로 말을 섞은 적이 없었다. 우연히 집에 가는 길이 같다고 알게 된 건, 낯선 섬나라 몰타에서 어학연수를 했다는 공통점을 알고 나서부터였다.

크리스마스이브 날, 모임이 끝나고 각자 집에 도착해 심심한 메시지를 주고받다가 "그렇게 심심하면 한 잔 하러 동네로 오던지요."라고 농담 반 진담 반 보냈다.

"정말 간다."

"할증 붙어서 택시비가 어마어마해요."

"그건 괜찮아." 남자는 택시 3만 원을 내고 한달음에 왔다. 진짜 올 줄이야. 술 어지간히 좋아하나 보네.

동네까지 누가 찾아온 건 처음이라 책임감이 생겨서 꽤 친해진 단골 포차에서 새벽 4시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후론 금요일마다 모임이 끝나면 함께 집 가는 전철을 타고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눴다.

신뢰가 생기고 편해졌을 무렵, 내가 전철에서 내리면 뒤따라 내려서 나를 놀라게 했다. 그러고는 우리 집에 왜 있는지 모르는 위스키를 홀짝홀짝 마시곤 했다. 내가 술을 안 마셔서 손님 오면 주려고 보관만 해두었었는데 이걸 설마 남자 한 명에게 몰아주게 될 줄이야.

"위스키를 정말 좋아해. 이 위스키 다 마실 때까지만 너네 집에 올게."  

.

.

.

입시 미술학원 다닐 때 만인의 짝사랑 대상이었던 남자 선생님이 있었다.

선생님은 길고 고운 손으로 내 도화지에 시범 소묘를 보여주며 말했다.

"미라야. 연애는 질보다 양이야. 무조건 많이 만나야 해."


선생님, 저는 선생님의 조언과 반대로 장기 연애만 합니다.

저도 질보다 양을 따르고 싶은데 안 되는 걸 어떡해요. 그래도 좋은 점이 있어요. 너무 지겨워서 헤어지고 나면 눈물이 나기는커녕 맑아지더라고요. 정신적으로 피폐해지진 않죠.

그리고 선생님,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연애 어려워하시는 거 저 다 알고 있어요. 혹시 양에 실패하신 건가요? 그게 아니라면 연애에 정답은 없다는 게 제 결론이에요.

 .

.

.

남자는 우리 집에서 일주일에 한 번, 술은 딱 3잔 정도만 마셨다. (차가 끊기기 전까지.)

"내가 전에 여자 친구랑 7년 동거를 했어. 그 후로는 다시 연애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

"왜요? 어떻게 헤어졌길래요?"

"다른 남자가 생겼더라고. 이미 감지하고 있었지만 티 내지 않고 지켜봤거든. 그런데 먼저 헤어지자고 말 꺼내더라고. 알았다고 했어."

"대화를 해 볼 수도 있었잖아요."

"여자는 이야기하고 싶어 했지만 어차피 헤어지자고 한 마당에 뒤늦게 이야기 들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마지막 대화 때문에 괜히 미련만 남을 수도 있으니까."

"그래도 7년을 한순간 정리하면 미련이 생길법한데. 붙잡고 싶고."

"안 붙잡아. 참느라 힘들었지. 매일 술 마셔서 살도 엄청 많이 찌고 수염도 덥수룩해지고."

남자는 유리컵에 든 술을 빙빙 돌렸다. 스모크 향과 옅은 곰팡이 냄새가 났다.

남자는 한 잔을 다 털어내고 말했다.

"그러다 보니 꿈이 생겼어. 연애하지 말고 카사노바가 되자."


... 에?


"그래도 카사노바는 아니지 않아요? 그것도 할 수 있는 성격이나 하는 거죠."

"맞아. 계속 다짐하는데 카사노바가 어려운 거더라고. 그래도 난 노력해볼 거야. 카사노바. "


 가만, 그럼 우리 집에 오는 게 설마 나랑 즐기려는 거야? 끼 부리는 거였어?

"저는 연애를 하지, 가볍게 즐기는 타입은 아닌데요. 호감이 컨트롤되나요."


그렇게 그리 설레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썸의 시작은 결과가 보이는 연애로 이어졌다.

어딘가 생각이 많아 마음을 탁 터놓을 수 없었던 연애를.


그리고 그의 7년의 동거 때도 이별이 깔끔했 듯, 나와의 이별도 깔끔했다. 헤어져야 할 이유는 너무나 많았고 품을 그릇이 없던 나는 지쳐버렸다.



신뢰가 있고 서로를 필요로 하는 관계라면 평생이라도 함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그에게 처음 1년간 느껴졌던 건 50%의 애정과 50%의  마음의 억제였고, 내가 결혼을 꿈꾸게 될까 봐, 그래서 책임져야 할까 봐 말과 행동에 심사숙고하고 있 것 같았다.


남자의 조심스러움이 무색하게도  연애 기간 동안 결혼을 생각해 보긴 했으나 하고 싶다고 갈망하지 않았다.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애정의 비중이 벽을 허물었을 때 결혼 얘기를 꺼낸 건 그였, 스스로의 상황에 좌절하고 포기한 것도 그였다.


왜 어른의 연애는 나이와 미래에 얽매여 계획까지 해야 하는 걸까.

현재의 감정에만 충실하길 바라는 것도 욕심일까.

혹시 내가 너무 이상주의적인 걸까.

나이 다 집어던지고 열심히 사랑하고 마음이 동할 때 미래 자연스럽게 계획될 수도 있지 않을까.

아, 몰라. 말은 쉽지.

어른의 세계 안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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