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를 위하는 마음
다 담을 수 없는 왁자지껄의 기록
<나의 '심심이'는 의외의'재미'라는 아이를 데리고 와서 나를 달래곤 한다.>
지연이가 자기 동네에 비건 반찬가게가 열리는 날 만나자고 했다.
지연이 딸에게 줄 그림책도 잔뜩 챙겨놓은 터라 흔쾌히 오케이 했다.
.
.
.
지연이는 중학교 친구이다. 과감하게 담임 수업 때 뒷자리에서 고무줄로 손 총을 쏘던 사이이다.
서로 큰 키가 같아 집에 갈 땐 어깨동무를 하고 다녔는데, 커트머리에 보이시한 목소리를 가진 내 친구가 어깨동무를 하면 다른 애들의 흘끔거리는 시선을 느꼈다.
그럴 때면 친구에게 말은 못 했지만 우리를 레즈비언으로 보는 건가(당시 그런 게 많아서.) 해서 어깨동무를 그만했으면 했다.
지금은 나보다도 세상 여자여자한 엄마가 되었지만.
우리가 오랜 친구로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나와 너무 비슷한 면 때문일 것이다.
낯을 가리고, 친구가 별로 없고, 위생에 예민한 면이 있으며, 고춧가루 많은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 취향적인 면.
그리고 그보다 더 큰 이유는 내 세계에 빠져 사는 나와 다르게 "네가 다른 친구 두 번 만나면 나는 세 번 만나줘야 해. 질투 난 단 말이야." 라며 장난스러운 집착을 하는 친구의 사랑 때문이다.
(다른 친구와 더 자주 만난 이유를 여러 번 해명해야 했다.)
보컬 트레이너인 지연이는 현재 음악 하는 남자와 사랑에 빠져 예쁜 딸 낳고 잘 산다.
.
.
.
출발 전 지연이에게 전화가 왔다.
"고구마 구워 놓을까?"
"응."
"언제 출발해?"
"대충 옷만 입고 나갈게. 맨 얼굴도 상관없잖아?"
"그렇지. 빨리 와."
길을 빙빙 돌아 도착한 친구 집은 아주 더웠다. 나시에 팬티만 입어도 될 정도이다. 아이가 있는 집은 대체로 덥다. 익숙한 온도가 아니라서 내 얼굴은 금세 벌게졌다.
3살 때 본 딸은 5살이 되어 내게 낯을 가리고 있었다. 내 책을 좋아해서 나와의 만남을 기대했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수빈이 엄청 말 많은 거 다 알아. 목소리 엄청 큰 거 전화하면서 다 들었거든. 흐흐."
자다 일어나 수줍게 뚱해있던 아이는 눈을 비비고 엄마에게 귓속말을 시도한다.
"엄마랑만 몰래 이야기하고!! 이모 서운하다!" 아이는 입꼬리를 올렸다.
"수빈아. 이모가 책 가져왔어. 신기한 거 보여줄게. 이거 봐."
그 뒤로 나는 수빈이의 "이모 이리 와 봐."의 늪에 빠져 계속 끌려다녀야 했다.
귀여운 것.
내가 온다고 하니 지연이는 전 날 밤늦게까지 내게 줄 비건 빵을 한가득 구웠다.
"빵 싸갈 통 가져왔어?" (내가 제로 웨이스트 지향하는 걸 아는 친구라 나보다 더 스트릭트 하게 군다.)
"아니, 빵 만들어 놨을 줄 모르고 반찬통만 가지고 왔지."
"내가 빵 만들어준댔잖아! 이 바보야!"
"진짜 몰랐어. 빵 구입할 때 쓰는 천가방이 있긴 한데, 거기 담아갈게."
"그래 , 좋다. 다 네 거야." 가방 한가득 10개가 넘는 빵이 담기고 있다.
"야, 그만 담아! 다 못 먹어!"
"알겠어. 파운드케이크는 속이 안 익은 듯 맛없게 됐어. 겉에만 뜯어먹고 안에는 버려."
"싫어. 왜 버려. 어렵게 만든 건데. 남기지 않고 다 먹을 거야. 음쓰는 없다."
--------------------------------------------------------------------
초등학생 때 몇 번 본 지연이의 남동생이 집에 방문한단다. 23년 만인가, 내 나이가 벌써... 오.
3살 어린 남동생의 얼굴이 가물가물하다. 수완이 좋아 골프 사업으로 성공을 거두었다고 한다. 크으.
"와, 성준아, 이게 얼마만이야. 오랜만이다."
"누나, 안녕하세요."
"얼굴이 좀 다른 것 같은데?"
"쟤 성형 안 했어. 그대로 큰 거야. 잘 컸지?"
"어 그러네. (위아래 훑훑)... 성준이가 어른 다 됐구나..."
그 말에 우리 셋 다 웃음이 터졌다. 내가 말하고 어이없어서 또 벌게졌다.
"누나 저 이제 30대 후반인데.ㅋㅋ"
"그러게.ㅋㅋㅋ 그런데 너 재력은 동생이 아니더라? 누나 오랜만에 봤으니 용돈 좀 줄래?"
"ㅋㅋㅋ성준아, 미라가(내 이름) 전화로 뭐라는 줄 알아? 너 양딸 필요없냬.ㅋㅋㅋ"
"필요 없니? 나 너의 딸이 되고 싶어.ㅋㅋㅋ아빠."
"ㅋㅋㅋㅋㅋㅋㅋㅋ"
저녁이 되어 지연이는 내게 밥을 차려주겠다며 냉장고 문을 열고 한참을 쪼그려 앉았다.
"너 주려고 어제 부침개 반죽했는데, 새우를 깜빡하고 넣었지 뭐야... 그럼 뭘 만들어야 하냐."
"간장에 밥 먹어도 돼. 난 아무거나 먹을 수 있어."
"싫어! 허접하게 차려주는 건 내가 싫어!"
남동생: "누나 비건은 밥이랑 간장, 그렇게 먹어요? 안 건강하겠는데..."
"아니거든? 집에서는 영양 균형 있게 잘 챙겨 먹거든? 야. 너 나랑 다음에 건강검진 맞짱 뜰래?"
"건강검진 맞짱이래.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지연이는 깔깔대며 냉장고를 탈탈 털어 간장 떡볶이를 만들기로 했다.
"미라야, 떡은 먹니?" -응.
"단무지는 먹니?" - 응.
나의 식성에 맞춰 고민하게 하는 게 미안함도 들었지만 고마움이 가장 컸다.
나의 지향성에 최대한 맞춰주던 친구는 정도는 이랬다.
"나 비닐장갑 껴도 돼?" / 음... 나라면 안 쓰지만 네가 필요하면 써.
"너한테 줄 빵, 포장지에 싸도 돼? 유산지야." / 아냐, 내 가방에 알아서 담을게."
"버섯은 먹니?" / 응.
"깨소금 넣어도 되니?" /.... 아 진짜, 장난하냐! 버섯이랑 깨소금을 동물로 만드냐고!"
"조심스러워서. ㅋㅋㅋ"
남동생: "누나, 곤충은 먹어요? 미래 식량이라고 하잖아요."
"안 먹어! 논 비건일 때도 곤충식은 안 했어. 그리고 비건이면 곤충도 안 먹지.."
친구: "성준아, 이렇게 생각하면 돼. 눈, 코, 입 있는 건 안 먹는다."
밤 10시, 차 끌고 나가면 으레 늦게 들어가기 때문에 이왕이면 지연이 남편(오빠)에게 인사하고 가려고 소파에 앉았다.
지연이가 대뜸 물었다.
"너는 연애할 생각이 아예 없는 거야?"
"아니? 완전 있는데?"
결혼할 생각이 없다는 내 말을 믿지 않는 내 친구는 나를 연애 포기자로까지 생각한 건가.
"음악 하는 사람 괜찮아?"
"직업을 따지진 않아."
"내가 어저께 오빠랑 네 얘길 했거든. 승태 오빠를 소개해 줄까 하고. 성격이 밝고 되게 좋아. 바깥사람들한테는 맺고 끊는 거 확실하고, 자기 사람한테는 다정다감해. 그렇지, 성준아?"
"응. 약간 흑형 스타일이에요."
"흑형? 만나서 막 주먹 대고 와썹 하는 분이야?"
"나 만났을 때 그런 식으로 인사한 적 있어요."
"그리고 그 오빠 이번에 회사 대표 직함도 달거든. 너랑 같은 야행성 스타일."
"그런데 나는 결혼 전제로 만나는 건 싫어. 지금 결혼 생각이 없다 보니 미래를 정해놓고 만나는 건 좀 그래."
"음... 그건 좀 그렇겠네. 만나다 보니 그럴 마음이 생기면 몰라도."
"어. 소개팅을 안 해봐서 서로 이성의 포커스로 마주하는 게 부담도 있고, 더군다나 내가 채식을 하고 환경을 생각하니까 그런 걸 이해해주지 않으면 어렵지."
"밤새 일하는 사람이니까 건강하게 먹는 건 당연히 좋아해. 비건식은 건강해서 좋아할 거야. 평소엔 알아서 먹고 너 만날 때 채식하면 되는 건데 뭐가 문제야."
상대가 내 신념을 존중은 하더라도 결국 함께하기에 아쉬워할 거란 생각은 떨쳐지지 않는다.
"얼굴도 괜찮아. 그런데 딱 하나 단점이, 키가 작아."
"얼마나?"
"나보다 작으니까... 좀 작지. 그런데 그거 빼면 되게 괜찮은데."
"나보다 작은 건 좀 그렇다. 알고 지내는 정도가 낫겠어."
집에 가기 전 어머니가 방문하셨다.
어머니 말을 들어보니 나는 다행히 예전과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언제나 말랐고, (현실은 복부 비만이지만)
언제나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고, (여름에도 한결같이)
같은 말투와 목소리에,
언제나 같은 얼굴이란다. (이건 잘못 보셨어요.)
친구는 전화 통화할 때마다 내 목소리에 어두움을 늘 걱정하며 다른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다고 말했었다. 그럴 때면 '난 아무렇지 않아. 집에만 있어서 목소리가 가라앉는 것뿐이야."라고 말했다.
밝은 에너지는 누구와 함께 하느냐에 따라 다른가보다. 나를 아는 사람들과 함께 있어 오늘은 발랄했던 중학생으로 돌아갔다.
담지 못할 만큼 많은 웃긴 얘기들을 나누고 밤 10시 반, 차량 없는 어두운 도로를 뚫고 달렸다.
심심함이 데려오는 재미들은 내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일깨우게 한다.
생각보다 지연이가 나를 많이 신경 쓰고 있다는 생각에 나의 무심함에게 살짝 채찍질을 했다.
지연이에게 나는 어떤 사람일까. 나는 신경 쓰는 게 없는데 어째서 나를 믿고 가장 친한 친구라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걸까.
나는 내가 고치고 싶은 단점은 잘 알고 있으면서 좋은 점은 잘 모르고 사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것들은 어째서 사랑을 받고 나서야 생각하고 깨닫는 건지. 내가 먼저 줄 생각은 왜 안 하는 건지. 마냥 절제하는 나를 나도 모르겠다.
2021년의 마지막까지 시간 여유가 있을 때 그동안 소홀했던 분들을 만나자고 계속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한가함이 기억 속 좋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덕에 일을 받아야 할 이유가 생기고 있어서 조금 복잡하다.
돈을 벌면 밖을 잘 안 나간다. = 오는 연락도 거절한다.
사랑을 하면 주변 시야가 차단된다. = 오는 연락만 받는다.
일을 쉬면 은혜를 베푸는 까치처럼 돌아다닌다. = 먼저 찾아다닌다.(마음은 불안)
이 세 가지의 밸런스를 잘 맞춘다면 더 다채로운 삶을 살 수도 있겠지?
-머리론 알면서 인생은 도돌이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