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초기 - 너를 잃을까 두려웠어
아빠가 된 걸 축하해
임신테스트기에 선명하게 나타난 두 줄을 확인하고, 전 날 술의 여파로 거실 쇼파에 쓰러져 있던(?) 오빠에게 처음 건넸던 말이다. 사람들은 우리가 하도 빨빨거리며 돌아다녀서 딩크족인 줄 알았다지만, 사실 가정을 갖는 건 우리가 연인으로 만나기 시작할 때부터 갖고 있던 꿈이었다. 올해가 가기 전에는 꼭 시도하자고 생각했고, 길게만 느껴졌던 몇 달 끝에 마침내 세상이가, 우리에게 왔다.
태명에 있어 유난히 까다로웠던 남편은 하루에도 수없이 제시하는 모든 옵션을 거절하더니
"세상을 다 가져라~ 세상이 어때?" 한 마디에,
"어? 세상이 좋은데? 홍세상!" 이러더니 드디어 세상이로 6주차쯤 태명이 낙찰되었다.
(그 전에 나 혼자 쓰던 태명은 "계절이"였다, 포시즌에서 생겨서.. ㅋㅋㅋ)
참 신기한게 계획했던 임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임신이 되니 우리가 부모가 될 거라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그런데 4-5개월이라는 시간을 거치며 배도 불러오고 주변 사람들과도 다가올 미래와 우리에게 찾아 올 아기에 대한 얘기들을 많이 나누다보니 이제야 슬슬 부모가 된다는 실감이 나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몸이 변해오고 있는 지금의 임신 기간이 힘들기는 하지만, 그만큼 앞으로 부모가 될 마음의 준비를 시켜주는 기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사실 결혼식도 꼭 필요한가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지만, 개인적으로 결혼식을 준비하는 몇 달간의 과정에서 새로운 가족의 일원이 될 준비를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아래에는 임신을 처음 알게 된 4주차부터 (임테기에서 두 줄을 발견했을 때 이미 임신 4주라는 사실도 그 때 알았음 ㅋㅋ) 흔히 임신 초기라 부르는 12주까지의 증상과 이야기들을 남겨본다.
임신을 알게 된 게 기뻤지만 한 편으로는 당황스럽기도 했다. 당장 일주일 뒤에 가족들과의 하와이 여행이 잡혀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회사에도 얘기하고 호텔도 비행기도 모두 예약이 된 상황. 가까운 친구들에 임신 소식과 함께 여행 계획을 이야기하니 아무래도 다들 걱정이었다. 임신 초반에는 유산 가능성이 꽤 높은 시기라 굴러가는 낙엽도 조심하라는데... 10시간 비행을 동반한 해외 여행을 가도 될 지 나도 걱정이긴 했다.
하지만 누구보다 과학적인 리서치를 가장 신뢰하는 똑똑한 남편을 둔 덕에, 임신 중 어떤 시기에도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오히려 운동하고 움직이는 게 좋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실 우리나라에도 그렇게 말씀하시는 선생님이 계시는데, 사람들은 이 영상을 "산모를 위한 따뜻한 말"로 생각하는 것 같아서 좀 안타까웠다. 그게 아니라 오히려 운동하고 돌아다니는 게 아닌 것 보다 더 좋은데... 처음에는 그런 눈치 때문에 한 시간 이상 걷는게 굉장히 신경쓰였더랬다.
여하간 주변의 걱정하는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리서치를 믿고 예정대로 하와이행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첫 며칠은 우리끼리 마우이섬에서 보내고 오아후 섬으로 넘어와 하루 이따 가족과 만나 약 3박 4일 간을 함께 보내는 일정이었다.
오아후가 아닌 다른 섬을 가 보는 것은 처음이라 역시나 또 한 번 꿈같은 며칠을 보냈다. (물론 개인적으로 우리는 호놀룰루가 더 좋다는 결론을 내렸지만 ㅎㅎ)
그리고 오아후 섬으로 들어와 가족들을 만나기 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임신 테스트기를 해봤는데 이럴수가...
2주 전만 해도 양쪽 모두 선명했던 임신테스트기의 두 줄 중 한 줄이 눈에 띄게 연해진 것이었다.
한 줄이 정말 잘 봐야 보일 정도로 연해져서 갑자기 멘붕이 왔다.
'이게 진짜 제대로 된 테스트 결과가 맞나?'
당황해서 인터넷을 찾아보기 시작했고, '화학적 유산'의 증상 중 하나라는 수많은 글들...
그 중 단 하나의 희망은 혹시나 물을 너무 많이 마셔서 그럴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하루 종일 물 한 모금 먹지 않고 여행은 하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다시 테스트 하기만을 기다렸다.
오빠는 내가 너무 걱정할까봐 그냥 임테기는 더 하지 말고 돌아가면 병원에 가자고 했지만 도저히 이 상황에서 정상적으로 여행을 즐기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저녁에 오빠 몰래 어느 호텔 화장실에서 다시 혼자 임신테스트기를 했다.
한쪽 줄이 더 연해졌다.
마치 엄청난 병을 선고 받은 것 처럼 마음 한 켠이 덜컹 내려앉았다.
사실 임신 사실을 안 지도 얼마 안되었고, 신체적인 증상도 별로 없었는데 그럼에도 너무나 소중한 걸 잃은 기분에 죄책감도 들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울며 불며 나오는 나에게 오빠는 당황하며 무슨 일인지 물었고, 내 얘기를 듣더니 우선은 숙소로 돌아가 저녁 동안은 쉬기로 했다.
저녁 내내 울며 오빠에게 원망 아닌 원망도 쏟아내었다. '그러게 주변에 말하지 말자니까 왜 말했어.. 화학적 유산은 꼭 엄마 때문은 아니래' 등등. 그리고 아픈 마음을 뒤로 하고 울다 지쳐 잠들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의지의 한국인인 나는 또 한번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약국으로 달려가 다른 종류의 임신테스트기를 함께 사왔다. 설명서를 꺼내어 정확하게 숙지했다. 혹시나 내가 했던 테스트 방식이 잘못되었던 건 아닐까, 내가 쓰는 브랜드가 잘못 된 건 아닐까 하는 실낱같은 희망.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른 브랜드 테스트기에서는 좀 더 확실히 임신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기쁘면서도 이상한 결과에 다시 이제까지 했던 테스트기들을 나란히 놓고 곰곰히 살펴보았다.
와.. 알고보니 임신 여부를 결정하는 테스트 선이 아니라 테스트선과 비교해야 하는 Control 선이 연해지고 있는 거였다!!!! 사실을 다 알고 나서 어찌어찌 First response 고객 센터에 연락을 하니 오히려 임신 호르몬이 너무 강하면 이렇게 된다는거다. 앞으로는 임테기는 안 해도 된다고..
정말 말도 안되게 바보같았던 내 실수를 알아차리고 아침부터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던 나를 발견한 오빠는 어안이 벙벙했다. 어제만 해도 울고 있던 내가 갑자기 춤을 추고 있으니... ㅋㅋㅋ 사실을 알게 되고 많이 놀리긴 했지만 그래도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우리에게 찾아온 생명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게 되었고, 유산의 아픔을 겪은 사람들에 대해 아주 조금이나마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게 된 것 같다.
세상아, 엄마가 너 잃어버릴까봐 진짜 걱정했어!
정말 감사하게도 입덧이 없는 산모라 입맛이 좀 바뀐 것 외에는 임신 초기에도 큰 어려움은 없었다.
이렇게 얘기하면 복받은 소리같지만 사실 그래서 오히려 더 걱정이었다. 하와이에서의 에피소드를 겪고나니 아이가 건강한지가 늘 궁금했는데 입덧처럼 분명한 임신 증상도 없으니.. 미국은 아무때나 병원에 가서 초음파를 볼 수 있는 시스템도 아니고.
그래도 생각해보면 임신을 확인하기 직전이나 그 후에 크고 작은 증상들이 왔다갔다 했던 것 같다.
가슴 통증/예민함 (초기) - 뭔가 스치기만 해도 기분 나쁜.... 이상한 느낌의 예민함과 통증이 있었다.
배 쓰림 (초기) - 생리통과는 확실히 다른 뭔가 찌릿한 느낌의 배 통증이 있었다.
입맛 변화 & 입맛 없음 (초기) - 미국으로 온 3년간 한식 한 번 안 찾던 내가 갑자기 한식이 너무 땡겨서 힘들었다. 덕분에 임신 후 체중도 오히려 떨어졌다. 구역질을 하는 형태의 입덧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찾아온 것 같다. 세상아.. 너 정말 제대로 한국인인가봐 ㅎㅎ
피로 (초-중기) - 예전보다 훨씬 일찍, 자주 졸린다. 초기 때 더 심했는데 어떻게 돌아다녔는지 모르겠다.
잦은 소변 (초-중기) - 확실히 화장실을 더 자주 간다.
피부 일어남 (초기) - 그러다 중기로 와서 다시 괜찮아졌다.
수면 중 팔 저림 (초-중기) - 확실히 혈액순환이 더 안되는 모양이다. 자다가 깨면 왼쪽 팔이 엄~청 저려서 꼭 주물러서 풀어줘야 하는 경우가 있다. 가끔은 왼쪽 손가락에서 발가락까지 한쪽이 전부 저려서 이러다 마비 오는 건 아닌가 걱정했다. 중기인 지금도 빈도는 줄었지만 왼쪽 팔 저림은 여전하다.
자면서 자주 깸 (초-중기) - 팔 저림과 잦은 화장실 때문에 통잠을 자는 날은 없어진지 오래다. (그래도 내가 원할 때 깨는 이 기간이 감사한거라고.. 애기 낳으면 내가 원하지 않을 때 깨야하니까 ㅎㅎㅎ)
여담으로 나는 배가 나오면 다들 예~쁘게 D자로 나오는 줄 알았는데 흔히 말하는 '아들배'라 그런지 아랫배 위주로 나와서 좀 아쉬웠다. (처음엔 살찐 줄 알았다 체중은 주는데.. ㅋㅋㅋㅋ) 좀 더 주차 수가 늘어나면 예쁜 D자가 될려나!!
임신 초기 이야기는 우리 세상이의 8주차, 12주차 초음파 사진과 영상으로 마무리 :)
8주차 - 세상이 심장소리를 처음 들은 날
12주차 - 세상이의 활동적인 꼬물거림을 본 날 (이전까진 계속 딸일거라 추측했는데 이 날 왠지 아들일 것 같았음!)
세상아 우리 건강하게 곧 만나
엄마 아빠가 기다릴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