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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서영 Jun 25. 2020

나, 인스타 저격당했다.

21세기, SNS 속 '관계의 삐라'들 

구도와 색감을 신경 쓴 하늘 사진. 그 밑엔 온갖 이모티콘과 함께 구구절절한 글. “... 요즘 들어 내 편이라 생각했던 사람에게 실망을 하게 된다....” 이 쎄한 느낌은 뭘까. 이게 말로만 듣던 ‘인스타 저격글’이라는 건가. 며칠 전 동아리 일에 바빴던 나는 동기의 생일을 까먹었고, 그는 크게 서운해했다. 그래도 사과를 몇 번이나 하고 뒤늦게 선물도 줬는데, 내가 팔로우하는 자기 계정에 이런 ‘저격글’을 올릴 진 몰랐다. 댓글엔 ‘무슨 일인 진 모르겠지만 힘내’라는 내용들이 달렸고, 정작 나는 댓글을 달수도 디엠을 보낼 수도 없었다. 철저히 발신자의 시각에서 재구성된 내용, 눈에 띄는 표지, 답할 수 없는 일방적 알림. 마치 ‘삐라’ 같은 게시글에 나는 화를 속으로 삭일 뿐이었다. 


사람들은 왜 1:1 메시지가 아닌 1:다(多) 게시글로 자신의 감정을 전달할까? 공격은 하고 싶고 역공은 받기 싫어서일 테다. 갈등의 부담은 지지 않으면서 상대방에게 상처를 입히는 쾌감은 얻고 싶은 것이다. 우리는 늘 갈등을 피하는 법을 배워왔다. 유치원에서 친구와 싸우던 시절, 억울하고 분한 마음에 엉엉 울고 있는데 선생님이 시켜서 억지 포옹을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집에선 하나뿐인 남동생과 치고받고 싸우다 엄마의 꾸중을 피하기 위해 허겁지겁 악수를 하곤 했다. 우리에겐 힘껏 맞서 볼 싸움판이 부재했고, 갈등의 ‘해소’보다는 ‘봉합’의 방법을 배웠다. 싸우고 푸는 법을 모르고 자라 버렸기 때문에 갈등에 대한 부담은 클 수밖에 없다. ‘갈등’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내 감정’만 해소하면 그만이다. 풍선에 삐라를 달아 후- 날려버리듯이, 내 감정만 해결하고 이 갈등 자체를 후- 날려버리면 완벽하다. 


그런데 이 감정 해소 방법은 무언가 불공평하다. 저격을 당한 사람은 심증은 있지만 물증은 없는 저격글에 답을 할 수 없게 된다. ‘이거 내 얘기하는 거지?’라고 씩씩대며 말해도 ‘너 얘기한 거 아닌데?’라고 잡아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익명의 저격을 함으로써 싸워볼 기회를 앗아가는 것이다. 싸움판 자체를 부셔버리는 행동이다. 하지만 이상하게, 갈등은 없는데 승리자와 패배자는 있는 기분이다. 저격을 한 사람이 승리자, 당한 사람이 패배자인 ‘갈등 없는 승패’의 결과다.


‘제거된’ 갈등에 의해 관계는 일방향으로 정의되고 그 일방향의 관계 속에서 한쪽이 죽어나간다. 엄연히 있어야 했을 갈등을 없애버리고 ‘왜 혼자 기분 나빠하냐며’ 상대의 목소리마저 앗아가는 건 학대이다. 학대를 당한 사람은 또 다른 학대의 가해자가 된다. 당해봤으니 그 방법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상대를 아프게 할 수 있는지 깨달았을 것이다. 쌍방의 관계를 체험하지 못한 이들은 일방향의 학대를 답습한다. 여러 개의 삐라가 모여 거리를 오염시키듯이, 수신자가 불명확한 ‘관계의 삐라’들은 세상을 병들게 한다. 


학대보단 차라리 싸우는 게 낫다. 쿨한 척하는 저격성 게시글보다 1:1 메시지로 오고 가는 쌍욕이 낫다. 갈등은 제거될 것이 아니라 드러나고 심화되어야 한다. 나의 마음과 상대의 마음을 위해 기꺼이 싸움꾼이 되어보기를 권한다. 정정당당한 싸움으로 입은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새살이 돋아나지만, 일방적으로 때린 상처는 곪아서 터진다. 알록달록한 삐라 대신 투박한 결투를 선택할 때다. ‘너가 미워, 싫어, 하지만 너의 대결 상대는 되어줄게’라는 용기가 관계를 발전시킨다. 맞서 싸운 뒤의 기분은 삐라를 단 풍선보다 더 가볍고 산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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