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결핍

어제를 담는 오늘

by 무녜


공기에 물이 가득하다. 질척한 공기가 코안에 들어오다가 묵직하게 고여버리는 것 같은 기분이다. 차라리 한바탕 비가 쏟아졌으면 좋겠는데, 아무래도 그럴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일이 끝나고 동생 H의 술 마시자는 연락을 받아 연남동 골목으로 걸음을 옮긴다. 작은 주막 문 앞에 다다르자 H의 빠르고 크고 톡톡 튀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H는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라는 은진이를 소개해 준다. 15살 때부터 친구였다는데, 17년 넘게 어떻게 친구일 수 있는지 싶을 정도로 둘은 정반대의 성향을 지니고 있다. H는 산만하고 외향적이고 거친 날것의 느낌인 반면 은진이는 수줍음이 많고 내향적이고 여성스럽다. 으레 첫 만남이 그러하듯, 처음엔 자신들의 과거 연애사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3년 동안 만난 전 남자친구가 진짜 별로였어요, 그 새끼는 네가 다 키웠지, 나도 너의 저번 남자친구 마음에 안 들었거든, 누구와 만나든 네가 아까워. 오가는 수많은 음담패설과 비속어들 사이로 서로에 대한 애정이 툭툭 튀어나왔다.




술이 조금 오른 H는 인천에 사는 남자친구가 보고 싶다고 했다. 사귄 지는 10일 정도 되었는데, 그중 8일 내내 만났다고, 진짜 이번엔 사랑하는 것 같다고. H는 자고 있다는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 인천에, 너에게 가고 싶다고 말했다. 핸드폰 너머로 언뜻 들리는 그의 목소리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밤늦게 위험해, 내일까지 참을 수 있지? 전화를 끊은 H는 말했다. 사랑한다면서 어떻게 이럴 수 있어?




H는 불안하다. 예쁘다. 사람들의 관심을 좋아한다. 한껏 흩뿌려진 에너지, 인간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아무 의도 없이 계속 채널을 돌리는 리모컨. 사실 H는 ADHD를 앓고 있는데, 언젠가 내게 사람을 꼬시고 싶지 않은데 무의식적으로 꼬시게 된다고, 어쩔 수가 없다고 토로한 적이 있다. (그게 가능한가 싶어 심리 상담에 종사하는 엄마에게 물어봤더니, 거짓이거나 틀린 말은 아니라고 했다.) 그런데 조금은 가벼워 보일 수 있는 H의 행동이 사실 나는 마음에 든다. 지나친 솔직함과 경솔한 말들, 명랑한 어투와 털털한 행동들. 누군가에게 연락을 하거나 혹은 누군가와 대화할 때 단어 하나하나 깊게 생각해야만 편안함을 느끼는 나는 H로부터 종종 나의 결핍을 확인한다.




H는 계속 투정을 부렸다. 언니, 나를 사랑한다고 했으면, 내가 보고 싶어서 간다고 했을 때 아무리 피곤하더라도 좋아해야 하는 거 아니야? 나 좋아하는 사람 많은데, 내가 왜 굳이 나에게 헌신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야 해? 사람들을 알다가도 모르겠어.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사랑은 헌신과 복종이랑은 달라. 그 사람은 너와 기질이 다른 것 같아, 쉼이 필요해. 나를 배려하지 않는 사람에게 어떻게 헌신할 수가 있겠어, 아무리 사랑한다 할지라도. 안정적이고 긴 연애를 할 수 없을 거야, 이런 방식으로는. 하지만 나는 오늘도 하고픈 말들을 머리에서 굴리고, 목에서 굴리고, 입안에서 마지막으로 굴리다가 결국 내뱉지 못한다. 내가 H였다면, 마음속 말을 다 쏟아내고 갈증 난 목을 맥주로 씻어낼 수 있었을까. (2025. 07.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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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 일본, 아침부터 가득찬 카페. 담배를 피우며 신문을 읽는 사람들과 구운 식빵에 버터를 올려 먹는 사람들. 노란 각설탕, 프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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